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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기획특집 이복재의 양평누비기Ⅱ
머리를 걸고 간도를 지킨 이중하(李重夏) (1)
영춘 이복재 경기도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현재 우리나라와 외국과의 영토분쟁은 독도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언젠가 통일한국이 되면 간도(間島)에 관한 영토문제는 반드시 짚어야 할 사안이다.

간도는 중국 동북 3성의 하나인 길림성 동남지역을 가리킨다. 현재 길림성에 속하는 연변조선인자치주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친황다오(秦皇島)에 있는 구(區)이다. 교통ㆍ군사상의 요지인 산하이관(山海關) 이동에서 북쪽으로 유조변책(柳條邊柵 ; 청나라가 만주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버드나무속 목책)을 따라 길림 북쪽의 송화강선으로 이어져 흑룡강 이동의 연해주를 포함한 지역을 말한다.

감터, 간도(墾島), 간토(墾土)ㆍ간토(艮土)ㆍ곤토(坤土), 간도(間島), 간도(艮島), 알동(斡東)ㆍ간동(幹東)ㆍ가강(假江)ㆍ강통(江通) 등의 여러 설이 있다. 본래 종성과 온성사이에 분파되어 흐르는 두만강 중간의 삼각주가 매우 비옥하였는데, 1870년경부터 부근의 주민이 이곳을 개간하기 시작하여 이곳을 간도(間島)라 불러 명칭의 기원이 되었다.

그 후 무산, 온성 사이의 주민이 도강하여 개간하는 자가 점차 급증하여 백두산 동쪽 기슭의 비옥한 토지는 개간하지 않은 곳이 없게 되어 이를 모두 일컬어 간도라 불렀다. 따라서 두만강과 압록강 대안지역의 개간지역을 자연스레 간도라 부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간도의 범위는 두만강의 조그마한 삼각주에서 시작하여 한민(韓民)이 개간한 곳은 모두 간도라 부르기 시작하여 점차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간도는 백두산 동쪽과 두만강 대안을 동간도라 부르며 동간도의 동부가 이른바 북간도이며, 압록강 대안지역과 송화강 상류지역의 백두산 서쪽을 서간도라 한다.

간도는 읍루(挹婁)와 옥저(沃沮)의 땅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고구려에 의해 복속된 후 오랫동안 고구려 지배하에 있었다. 통일 신라 시대에는 발해 왕국이 200여년간 이 땅을 지배했다. 고려시대로부터 조선 전기에 걸쳐서는 여진족들이 각지에 흩어져 살았다. 우리 동포들의 간도 이주는 조선 초부터 시작되었다. 세조 14년(1468년)의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빈 땅에 백성들이 들어가 토지를 개간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여진족이 세를 결집해 후금을 세우기 전까지 조선 백성의 간도 개간은 공공연한 일이었다.

조선의 변경은 백두산 동쪽의 동북지방과 압록강 연안지방을 지칭하는데 조선과 청국 간의 국경획정론은 인조 5년(1627) 정묘호란에서 비롯되었다. 병자호란의 결과로 체결한 강화조약〔강도회맹(江都會盟)〕에서 두만강과 압록강 대안(對岸)에 봉금지대(封禁地帶)를 설정하고 양국인의 거주를 금하여 무인지대의 국경지역을 이루게 되었다. 여기에서 강역 엄수는 영토 확보 관할의 의미보다는 월경을 엄금한다는 의미였던 것으로 보인다.

1644년 청조의 입관(入關 ; 만주족의 북경 점령) 이후 본연의 근거지인 만주는 점차 공광(空曠)해져 갔으며 선조 발생의 성지라는 명목으로 인적을 용납하지 않는 봉금지대로 묶었다. 즉, 17세기 후반에 청은 만주족인 자신들의 본거지 보호를 위해 심양(瀋陽) 동쪽 일대에 광범위한 봉금지대를 설정하여 한족들의 개간과 거주를 금하였다. 조선도 주민들이 이 봉금 지역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두만강, 압록강 대안 지역에 대한 왕래를 금하였다. 결과 이 지역은 무주공산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그러나 삼과 동물가죽〔초피(貂皮)〕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이를 구하기 위한 지역주민들의 활동이 꾸준히 증가하였고, 이로 인해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과 백두산 부근에서 조선과 청의 주민들이 서로 접촉하는 일이 잦았으며 그 결과 상호충돌이 빈번히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인과 청나라 사람들 간의 크고 작은 분쟁이 발생하자 1712년(숙종 38) 청의 요청으로 천지(天池) 동남쪽 4km 지점에 양국 간 경계를 분명히 할 목적으로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 ; 중국 측 지도에는 ‘穆碑’로 표시)가 세워졌다. 정계비의 내용은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 勒石爲記”으로, ‘서쪽은 압록강으로, 동쪽은 토문강(土門江)으로 정계를 삼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 민족이 선점하여 개간을 시작하였으니 이때가 철종 말부터 고종 초였다. 19세기 후반 이후 조선에서 전국적으로 환곡의 폐해가 심해지고 부담이 늘어나자 함경도와 평안도 북변의 주민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농사를 짓고 이주하는 경우가 점차 늘어났다. 조선 조정은 이들의 월강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는 대신에 귀환시키려 했으나 돌아온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당시 이 지역에 대한 청의 통제력이 매우 미비했기 때문에 조선인 이주자들의 정착은 확대되었다.

청은 1877년에 국자가(局子街; 현재의 延吉市)에 초간국(招墾局)을 설치하고, 1881년부터 봉금을 해제하고 청국인의 간도 이주와 개간·농경을 장려하는 정책을 취했으며, 조선인들에게도 귀화를 요구하였다. 1882년 초에는 조선에 월경사간(越境私墾)을 엄금하도록 요구해 왔다. 여기에다 먼저 이주한 우리 농민과 새로 입주하게 되는 청나라 사람들의 문제로 간도의 정치적 영유권의 문제가 발생되었다.

(이글은 간도찾기운동본부홈페이지(www.gando.or.kr)와 「세종정책연구2014-4」‘북한-중국국경 획정(劃定)에 관한 연구(이종석 지음)’를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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