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지방선거 기획특집①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Ⅱ

민선1기 민자당 당선 이후 무소속만 4회

준비된 후보 아닌 예상 밖 후보의 약진

양평선거사 연재를 이어가며

제7회 6‧13 전국동시지방선거를 7개월 앞둔 현재 야당들의 공세에도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율이 각각 71.6%, 51.3%(20일자 리얼미터 발표, 자유한국당 18.3%, 바른정당 5.7%, 정의당 5.0%, 국민의당 4.9%)를 기록하며 떨어질 줄 모른다. 한국사회의 적폐청산을 바라는 국민의 의지가 지속되는 한 내년 지방선거는 여당이 압승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양평의 상황은 이와는 다소 다르다. 군수출마를 선언한 후보 중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거론되는 인물들은 모두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 후보다. 보수당의 분열과 민주당의 높은 지지율, 국민의 적폐청산 열망 등 민주당의 당선 가능성이 어느 선거보다 높지만, 지역 정가에서는 현재 민주당 후보들로는 어렵다는 냉정한 분석이 지배적이다.

본지는 지난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3회에 걸쳐 1~4회 지방선거 및 2007년 군수재선거에 대한 선거사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을 연재했다. 이번호부터 재선거 및 5~6회 지방선거사 기획기사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Ⅱ’를 3회에 걸쳐 연재한다. 지난 선거과정을 되살펴 문제점을 공론화하고, 유권자에게 후보자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 양평을 발전시킬 좋은 후보를 뽑자는 취지다.

선거사를 취재하며 이전 지방선거 과정이 정책과 공약 대결이 아닌 지연‧학연에 묶인 조직선거, 금권선거, 인물선거의 면모가 강했음을 실감한다. 내년 선거 또한 현재까지는 이전과 다를 바 없이 흘러가는 양상이다. 그 중심에는 일명 ‘토박이당’이라 불리는 조직이 있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Ⅱ’는 과거 선거판을 뒤흔들었던 토박이당의 실체와 현 군수후보들의 과거행적을 중심으로 기술한다. 그 과정에서 정책이 아닌 인물을 중심으로 한 선거의 한계와 과오가 명확히 드러나길 기대한다. 여기에는 여전히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시민단체 또한 포함된다.

◇ 민병채, 한택수 박빙으로 군수 당선

1995년 6월27일 치러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양평군의 첫 민선군수는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고 (주)삼선공업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던 민병채씨가 당선됐다. 그는 당시 민자당 후보로 나섰는데 선거를 불과 한 달 남겨둔 상황에서 급조한 후보였다.

당시 집권당인 민자당은 유력 후보였던 민주당 이병대씨의 대항마가 없던 상황에서 부랴부랴 민 전 군수를 영입했는데 육사‧군 출신이라는 신뢰감과 성공한 CEO로서 경영능력까지 겸비한 좋은 이미지로 순식간에 선거판을 흔들었다. 결정적으로는 야당성향의 표가 이병대 후보에게 집중되지 못하고 4명의 무소속 후보들에게 분산된 점도 민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막판까지 접전을 벌였지만 결과는 민 후보의 830표 차 승리였다. 당선 후 민 군수는 군정목표를 ‘삼풍의 양평’으로 정하고 군정을 혁신할 ‘개혁추진기획단’을 발족시키며 양평군 공직사회를 개혁했다.

1998년 6월4일 2회 선거에서 민 전 군수는 무소속으로 나서 1회 때 어렵게 꺾은 이병대 후보를 큰 차이로 이긴다. 민 군수는 공직사회 혁신, 친환경농업 도입 등 개혁정책을 펼치며 기존 기득권세력, 즉 보수적 성향의 지역 토호세력보다는 젊은 신흥세력과 농민들과 접촉면을 넓히며 자신만의 세력을 형성했다. 이때 모인 사람들이 바로 ‘토박이당’의 모체인데, 이들의 정체는 다음 순서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이 조직과 함께 치른 2회 선거에서 민 전 군수는 압승을 거뒀는데, 당시 양평시민들이 개혁과 변화를 원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2002년 6월13일 3회 지방선거는 토박이당의 저력을 보여준 선거로 지역사회에 강한 인상을 심어준 계기였다. 선거를 6개월 앞둔 상황에서 당연히 3선에 나설 것으로 예상됐던 민 전 군수가 ‘불출마’를 선언하며 지역정가는 요동쳤다.

당시 집권당인 한나라당은 치열한 경선을 거쳤지만 결국 경선불복사태가 벌어지며 자멸했고, 토박이당은 민주당과 손잡고 성공적인 공직생활을 해왔던 한택수(당시 경기도청 기획행정실장)씨를 후보로 내세웠다. 결과는 놀랍게도 한택수 전 군수의 승리였다. 표 차이는 고작 654표였다.

한택수 군수는 새로운 사업을 벌이기보다는 전임 민병채 군수의 정책을 대부분 승계했다. 오랜 공직생활로 실무에 밝았던 한 군수는 도시계획 전공자답게 양평의 도시계획을 새로 세우는 것에 주력했다.

특별한 실정이 없었던 한 전 군수는 이어진 4회 선거에서 무난히 당선됐지만 6개월 만에 선거법위반으로 군수직을 상실해 2007년 군수 재선거를 치르게 된다.

◇ 김선교-강병국, 예상 밖의 후보

2007년 4월25일 치러진 양평군수 재선거는 한나라당의 압승이 예상됐다. 당시 한나라당 쪽의 대세는 유병덕씨와 서광원씨가 거론됐는데 경선 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강병국(당시 43세, 경기도지사 정책보좌관)씨가 낙점됐다.

결과를 두고 당시 정가에서는 뒷말이 많았다. 당시 선거상황을 잘 아는 정가 관계자는 “한나라당 공천경쟁에 유병덕, 서광원, 강병국, 이희영, 정인영 등 10명이 신청했는데 누구도 강병국씨가 후보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뜻밖의 결과에 많은 사람들이 정병국 국회의원이 자신보다 연배가 많은 유병덕, 서광원씨를 배제하고, 어린 강병국을 택한 것 아니냐는 얘기가 많았고, 대부분이 그렇게 믿었다”고 말했다.

충격적인 공천결과에 결국 유병덕씨가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고, 이는 결국 한나라당 선거패배의 큰 요인이 된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토박이당은 한나라당에 대항할 후보 찾기에 급급했다. 이들의 결정은 양평군 토박이 출신 공직자인 김선교였다. 민병채-한택수 군수 시절 초고속 승진을 한 공직자는 이창승 당시 문화관광과장과 김선교 당시 양서면장이었다. 선거에 관여했던 한 관계자는 “이창승과 김선교의 비정상적인 승진 배경에는 민병채-한택수 전 군수를 잇는 후계자 키우기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토박이당 진영에서 이창승씨에게 먼저 제안했지만 그가 머뭇거리는 동안 김선교 군수가 “아무도 나가지 않겠다면 내가 명퇴하고 출마하겠다”고 선수를 치고 나왔다.

김 군수의 갑작스런 선언으로 후보가 정리되자 토박이당 진영은 재빠르게 선거체제로 전환했다. 당시 토박이당과 결탁된 민주당은 박장수씨의 후보신청도 거부한 채 조직적으로 김선교 후보를 밀었다.

한나라당이 비록 인지도가 낮은 강병국을 후보로 내세우고, 경선불복이라는 악재가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한나라당의 승리를 점쳤다. 그러나 당시 선거운동을 직접 띈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김선교 군수 쪽으로 저울추가 기울고 있었다고 말했다. 정가 한 관계자는 “당시 한나라당 선거운동원들은 낮에는 강병국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 밤이 되면 김선교 캠프로 몰려왔다”며 “이들이 토박이당과 결탁해 결국 선거가 뒤집어졌다”고 당시를 증언했다. (다음호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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