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춘 이복재 경기도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태종 11년에는 『홍무예제』에 따라 성황신을 풍운뇌우신(風雲雷雨神) 및 산천신(山川神)과 함께 중사로 치제하도록 하였고, 세종 대의 『오례의(五禮儀)』와 성종 대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제정하면서 예제의 전거를 마련하였다. 『세종실록(世宗實錄)』권 128, 오례 길례(五禮 吉禮), 변사조(辨祀條)에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大祀:社稷·宗廟. 中祀:風雲雷雨(山川 城隍 附)·岳·海·瀆·先農·先蠶·雩祀·文宣王·朝鮮檀君·後朝鮮始祖箕子·高麗始祖. 小祀:靈星·名山大川·司寒·馬祖·先牧·馬社·馬步·七祀·禜祭.”

이에 따르면 성황제는 중제에 속하며 풍운뇌우(風雲雷雨)에 관한 제사에 붙여서 지내도록 분류돼 있다. 국가의 예제이던 성황제는 그 후 군ㆍ현의 제례로 시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음사(淫祀 ; 부정한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로 몰려 거의 폐기 되다시피 되어 촌락단위의 행사가 됨으로써 성황제의 위상과 성격이 크게 변화하였다.

이에 관하여 ‘『신편한국사』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5. 민간신앙 / 2) 기타 민간신앙 / (1) 군·현제의’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조선 초기 이래 중앙정부가 지방통치 수단의 하나로 군ㆍ현에 설치하거나 시행한 제례(祭儀)로는 사직제(社稷祭)ㆍ성황제(城隍祭)ㆍ여제(厲祭)ㆍ기우제(祈雨祭)ㆍ향교석존례(鄕校釋奠禮) 등이 있다. 또한 지방에 따라서는 향리들의 주관으로 ‘부군당(府君堂)’에서 부군제가 행해졌다. 그러나 성황제 등은 중앙에서 설정했던 당초의 실시 목적과 어긋나게 지방토호들이 여전히 여기에 개입하였으므로 중기에 이르러 이 제의의 폐지가 건의되고 이후 대부분의 지역에서 토호가 배제되는 등 군민행사로는 시행되지 않게 되었다.

(중략)

성황은 주로 ‘서낭’으로 불리며 조선 후기에 민간화된 제의(祭儀)의 전형이다. 이규경은 ‘선왕당(仙王堂)’이라는 것은 성황을 잘못 부른 것이라고 하였다.

군ㆍ현제의로서의 성황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사족들에 의해 음사(淫祀)로 몰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폐기되거나 유명무실해졌다. 그 대신 이것은 생산력의 발달과 함께 촌락이 성장ㆍ확대되어 가면서 촌락단위의 행사로 주변화되어 갔다. 

여제는 여역(厲疫) 즉 전염병을 퍼뜨리는 귀신인 여귀(厲鬼) 또는 무사구신(無祀鬼神)에게 지내는 제사다. 민간화된 성황당에는 토지신ㆍ성황신ㆍ여역신의 3위를 모시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것은 군ㆍ현 단위의 사직제ㆍ성황제ㆍ여제가 마을 단위의 행사로 주변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인 것 같다.(이하 생략)“

국가나 지방의 군ㆍ현 단위의례로 시행하던 이른바 국행성황제가 촌락단위의 서낭제로 그 위상과 성격이 바뀌었지만 조선중기 이후에 관치 성황제가 완전히 없어졌다고는 볼 수 없다. 조선 중기 이후 삼단일묘제(三壇一廟制)가 시행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성황제는 여제(厲祭), 사직제(社稷祭)와 함께 지방관리들이 치제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지내오던 토호적인 성황제는 사족들에 의해 음사로 몰려 대부분 사라지고 대신 각 고을마다 수령의 주관 아래 봄, 가을로 사전적인 향례가 행해져 토착화되기도 하였다. 토착적인 성황제는 조선 후기는 물론 일제강점기 때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양평군도 조선시대와 대한제국기에 편찬한 각종 지리지와 읍지류에 3단, 즉 사직단(社稷壇), 여단(厲壇), 성황사(城隍祠) 또는 성황단(城隍壇)이 기록되어있다. 이 중 성황사 또는 성황단(이하 ‘성황사’라 한다)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ㆍ『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양근군편 사묘조(祀廟條)에 “성황사 재군서십리(城隍祠 在郡西十里)”, 지평현편 사묘조에 “성황사 재현북(城隍祠 在縣北)”, 『여지도서(輿地圖書)』 양근군편 단묘조(壇廟條)에 “성황사 재군북십리(城隍祠 在郡北十里)”, 지평현편 단묘조에 “성황사 재현북(城隍祠 在縣北)”, 『경기지(京畿誌)』ㆍ『경기읍지(京畿邑誌)』 지평현기사 단묘조에 “성황사 재현북일리(城隍祠 在縣北一里)”, 『기전읍지(畿甸邑誌)』 양근군기사 사우조에 “성황사 재군북십리(城隍祠 在郡北十里)”, 『양근군읍지(楊根郡邑誌)』 단조(壇條)에 “성황단 재군서십리(城隍壇 在郡西十里)”

이상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양근과 지평에 성황사가 존재하였음은 군ㆍ현 수령의 주관아래 는 여제(厲祭), 사직제(社稷祭)와 함께 지방관리들이 성황제를 치제하였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토호적인 성황제가 수령의 주관 아래 봄, 가을로 사전적인 향례로 행해졌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지금의 지평면 지평리에서는 지금도 매년 한 번씩 봉미산성황대제(鳳尾山城隍大祭)를 지내고 있다. 지평리는 1908년 9월 양근군과 지평군이 합해 양평군으로 통합되기 이전 까지 고구려시대 이후 수백 년 동안 지평현 또는 지평군의 읍치(邑治)였다. 지평리 지평현(군)관아터의 북쪽 뒷산인 봉미산에는 봉미산성황사(鳳尾山城隍祠)가 있다. 지평면 지평리 산14번지 지평현의 주산(主山)으로 삼았던 봉미산 정상부에는 6.25전쟁 전까지 예전에 지은 성황사가 존재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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