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춘 이복재 경기도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성황신의 덕호(德護)에 관한 기사도 있다. 『고려사』권29, 세가 권제29, 충렬왕(忠烈王) 7년, 1월에는 “사전(祀典)에 등재된 전국의 성황(城隍)ㆍ명산(名山)ㆍ대천(大川)에 덕호를 덧붙였다”는 기사가 있다. 성황신을 이미 사전에 등재하여 국가가 관리하였던 것이다.

옥천면 용천리 용문산 서록에 있는 함왕성의 옛 주인으로 본관이 양근〔楊根, ‘항양(恒陽)’이라고도 했음〕인 태조공신(太祖功臣) 규(規)의 5세손으로 일생을 베옷만을 입고 질그릇을 쓰며 청빈하게 살았고, 의종 때는 교로도감(橋路都監)이 되어 도성 안의 무당과 음사(淫祠 귀신을 모신 집)가 많아 민심을 현혹시키므로 음사는 모두 불 지르고 무당은 교외로 내쫓아 미신을 배척한 것으로도 유명한 함유일(咸有一)에 관한 기록에서도 성황신에 관한 내용이 전한다. “등주(登州) 성황신(城隍神)이 누차 무당에게 내려와 화복을 기묘하게 맞추었다. 함유일은 삭방도감 창사(朔方道監 倉使)가 되어 나라의 제사를 거행하면서 읍만 할 뿐 절하지 않았다. 유사(有司)에서 왕의 뜻에 맞추고자 그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고려사절요』권13, 명종2(明宗二), 명종(明宗) 15년, 11월). 알려진 성황신에게는 관리를 파견하여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파견된 책임자가 절을 하지 않고 읍만 했다고 하여 탄핵하여 파직까지 시켰으리만치 중요시 여겼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뿐 아니라 함유일과 같은 관리는 국가의 정책과 달리 성황을 이미 음사로 여겼던 점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고려사절요』 권24, 충숙왕(忠肅王), 충숙왕(忠肅王) 15년, 7월에는 “호승(胡僧 외국승려) 지공(指空)이 연복정(延福亭)에서 계율을 설파하자 사녀(士女)들이 달려와서 들었다. 계림사록(雞林司錄) 이광순(李光順) 역시 무생계(無生戒 진리의 세계에 들어서, 앞으로 다시는 윤회의 생을 받지 않는 계)를 받아 주(州)의 백성들로 하여금 성황을 제사하며 고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백성들이 돼지를 기르는 것을 매우 엄격하게 금지하니, 고을 사람들이 하루 동안 자신들이 기르던 돼지들을 모두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성황제에는 고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의 성황신에 관한 존호는 1370년(공민왕 19년) 7월 명나라의 황제가 비서감직장(秘書監直長) 하상봉(夏祥鳳)을 파견하여 조서(詔書)를 내려 제도를 바꾸게 된다. 즉 “오악(五嶽)ㆍ오진(五鎭)ㆍ사해(四海)ㆍ사독(四瀆)은 모두 전대에 봉하였던 명호를 제거하고 단지 산과 물의 본래 칭호로써 그 신을 부르도록 한다”며, 군현(郡縣)의 성황신(城隍神)의 칭호도 모두 봉호를 고치도록 했는데 “각 지역의 주(州)ㆍ부(府)ㆍ현(縣)의 성황은 모부(某府)의 성황지신(城隍之神), 모주(某州)의 성황지신(城隍之神), 모현(某縣)의 성황지신(城隍之神)이라고 일컫는다”고 새로 제정하여 시행토록 했던 것이다. 이로써 성황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 10세기 말엽이전부터 봉황신에게 부여하던 작호를 없애고 지방행정단위인 주ㆍ부ㆍ현 단위로 지역명 다음에 성황지신을 넣는 명칭으로 바꾸게 했던 것으로 보아 성황신을 모시고 제사를 모시는 신묘인 성황사나 성황신사는 주ㆍ부ㆍ현마다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는 1360년(공민왕 9) 3월 “여러 도와 주군(州郡)의 성황(城隍)을 여러 신묘(神廟)에서 제사하며 전승에 대하여 사례하였다”는 기사(『고려사』권63, 지 권제17, 예5(禮 五), 길례소사, 잡사)가 기록되어있는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중국의 성황신앙 연구 성과들을 참조하면 중국의 성황신 신앙은 6세기 무렵에 양자강유역을 중심으로 발생하였으며, 도시를 중심으로 상공업이 발달함에 따라 10세기경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고, 마침내 국가제사의 대상이 되기까지 하였다. 성황신 신앙은 도시 내에 있는 성황묘(城隍廟)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성황묘에 모셔지는 성황신은 그 지역과 관련이 깊은 역사적 인물인 경우가 많다. 성황신은 처음에는 도시의 방어에 영험 있는 신으로 신앙되었으나 후대로 가면서 도시의 기후를 통어하고 지역주민의 길흉화복을 조절하며 사후세계를 지배하는 존재로 의미가 확대되어 갔다(이상 『신편 한국사』16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3. 민속종교, 2) 민속종교의 신 관념, (3) 성황신)에서 인용)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황제는 중국 전래설이 확실하며, 고려의 성황제는 국가 또는 지방의례의 하나로 정착되었던 국행성황제였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집권적 지배체제가 확립되고 성리학의 지배이념에 따라 유교제례가 도입되면서 성황제도 유교예제의 적용을 받게 된다. 태조 원년의 사전 개편안에는 “여러 주(州)·군(郡)의 성황으로서 국제(國祭)로 청허(請許)된 것에는 모주(某州)ㆍ모군(某郡)의 성황지신(城隍之神)이라고 칭하고 위판(位版)을 설치하여 수령으로 하여금 봄ㆍ가을마다 제사를 지내되 제물(祭物)ㆍ제기(祭器)ㆍ작헌례(爵獻禮)는 한결같이 조정(朝廷)의 예제(禮制)에 따르라”(『태조실록』1권, 태조 1년 8월 11일 경신 2번째 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고 명시하고 있어 고려시대의 제도를 이어 시행하면서도 유교예제로의 변화를 보였다. 태종대에는 의례상정소가 설치되고 사전(祀典) 제도를 정비하였는바 성황은 종묘, 사직에 이어 중사(中祀)로 편제시켜 왕권의 위계질서에 따르게 하였다. 

저작권자 © 양평시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