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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 봉미산성황대제(1)

성황(城隍)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성황이 원말로 서낭이 되었으며 성황신은 서낭신으로, 성황제는 서낭제가 되었다는 것이니 두 말은 같은 말이다. 달리 말하면 성황이라는 한자어를 우리말로는 서낭으로 썼다는 이야기도 된다. 성황을 의역하면 성(城)의 해자(垓字), 즉 ‘성 밖으로 둘러 판 마른 못’으로 외적이 침략할 때 성을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파놓는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성황신(城隍神)이란 성의 해자를 지켜주는 신으로 결국 성안에 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성을 지켜주는 신이라는 뜻이 된다. 일부에서는 서낭을 선왕(仙王)이라 하고 서낭당을 선왕당(仙王堂)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성황의 화음으로 그릇된 말이라는 주장이 있는가하면 성황→선왕→서낭의 음운 변화로 인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전자를 따르는 분위기이다. 서낭이란 말이 성황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국어사전에 적혀있듯이 성황과 서낭, 성황신과 서낭신, 성황제나 서낭제가 같은 말이라는 설명이 맞는다 하더라도 이 둘은 구분하여 써야할 것 같다. 그 이유는 우선 성황과 서낭은 미치는 범위가 각각 크게 다름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성황의 범위는 앞에서 살펴본 대로 성이라는 광역임에 비추어, 서낭이 미치는 범위는 마을이라는 작은 단위인 것이다. 즉 성황신의 수호범위는 성이고 서낭신의 수호범위는 어디까지나 마을이며, 성황제는 성이 서낭제는 마을이 주관하여 올리어왔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성황사〔城隍祠, 또는 성황당(城隍堂), 이하 같다〕과 서낭(또는 서낭당)이 자리 잡고 있는 위치도 대개는 다르다. 성황사는 평상시 성황신(城隍神, 또는 ‘성황신주’, 이하 같다)를 안에 모시다가 정해진 날 문을 열고 제사를 올린다. 이른 바 성황제이다. 일반적으로 성황사는 읍치의 뒷산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반면 서낭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동구 밖이나 마을로 통하는 고갯마루에 위치하며 주로 신수(神樹)로 여기는 거목의 서낭목을 중심으로 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나씩 던지고 간 돌무더기로 형성되어 있다. 마을에 따라서는 서낭과 다르게 서낭당을 별도로 지어 안에 신주를 모시다가 서낭제를 지내는 곳도 볼 수 있는데 이때 서낭당은 주로 마을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음도 참고해야 할 부분이다. 다만 서낭제를 성황제라고도 해 혼용하는 경우가 흔한 것도 현실이다. 성황은 국가 또는 지방행정구역단위의 광역성과 제도성을 가지며 서낭은 마을단위의 토지와 촌락을 지켜주는 민속 신앙적 개념으로 구분하면 혼동이 덜할 것 같다.

위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서낭ㆍ서낭신ㆍ서낭제의 원말이 성황ㆍ성황신ㆍ성황제라고 했으니 기록을 통해 성황ㆍ성황신ㆍ성황제에 관해 고찰해보면 이에 관한 역사성과 제도적 성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사(高麗史)』권 90, 열전(列傳) 3, 안종 왕욱(安宗 王郁)편에 고려태조의 왕자 중 하나인 안종 왕욱이 사수현(泗水縣 : 지금의 사천)으로 유배를 가서 그의 아들 왕순〔王詢, 후에 현종(顯宗)이 됨)에게 “내가 죽거든 이 금을 술사(術師)에게 주어서 이 고을 성황당(城隍堂)의 남쪽 귀룡동(歸龍洞)에 장사지내게 하되 반드시 엎어서 묻게 하여라”라고 하였다는 것이 우리나라에서의 성황에 관한 첫 번째 기록이다. 안종 왕욱이 사수현으로 유배를 당한 것은 성종대(981∼997)의 일이므로 고려에는 이 무렵 이전에 이미 성황당이 있었고, 성황신을 모셨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055년〔문종(文宗) 9〕 3월에는 “선덕진(宣德鎭)의 새로 수축한 성에 성황신사(城隍神祠)를 마련해 숭위(崇威)라는 이름을 내리고 봄ㆍ가을로 제사지내게 하였다”는 기록(『고려사』권63, 지 권제17, 예5(禮 五), 길례소사, 잡사)이 있고, 1319년 8월에는 “왕이 덕수현(德水縣)에서 사냥을 하다가 성황신사(城隍神祠)를 불태우라고 명령하였다. 대개 해동청(海東靑, 매)과 내구마(內廏馬)가 폐사한 일로 화가 났기 때문이었다”는 기록도 있다(『고려사절요』 권24, 충숙왕(忠肅王), 충숙왕(忠肅王) 6년, 8월). 이는 성황신을 모신 집을 초기에 불렀던 성황당이 아니라 성황신사로 사묘(祀廟)의 형태로 발전하였으며, 왕이 제사의 명칭을 내려주고 국가의례의 하나로 제사를 지내게 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1236년〔고종(高宗) 23〕10월에는 “몽고군이 온수군(溫水郡)을 포위하므로 군의 향리[郡吏]인 현려(玄呂) 등이 성문을 열고 나가 싸워 적을 대파하고 머리 2급(級)을 베었다. 화살과 돌에 맞아 죽은 자가 200여 인이고 노획한 병장기[兵仗]가 매우 많았다. 왕이 온수군의 성황신(城隍神)이 은밀히 도운[密祐] 공이 있다고 하여 성황신에게 존호를 더하여 주고 현려는 군(郡)의 호장(戶長)으로 삼았다”는 기사가 있다.(『고려사』권23, 세가 권제23, 고종(高宗) 23년, 9월). 이는 성황신을 모셨음은 물론 존호까지 주었다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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