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당 이식의 동계팔경(東溪八景)

택풍당의 동쪽인 말미산을 넘으면 언덕이 튀어나와 있는 물굽이가 있었을 바위를 쉽게 찾아 낼 수 있고 이곳이 조적대였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양동면 소재지였던 쌍학1리를 우회하는 외곽도로가 나면서 건설된 을미의병교의 서단에서 북쪽으로 300m쯤 떨어진 곳이다. 조적대의 앞까지 당시의 물길을 다른 곳으로 돌려 막아 둑을 쌓고 그 안쪽은 흙을 메워 논이나 밭 등 경작지로 쓰고 있고 제법 깊은 물굽이가 있었을 바로 앞도 흙으로 메워져 수로와 농로가 되었다.

흙이 덜 메워진 산 쪽을 살펴보면 옛날 깊던 물속까지 박혀있을 몇 길 됨직한 바위가 조금 드러나 보이고 위쪽의 산도 잡목이 우거지긴 했으나 평평하여 택풍당에서 산을 넘어와 그 평평하고 바위가 튀어 나온 곳에 앉아 바위아래 물굽이가 만든 깊은 물속에다 낚시 줄을 내리고 낚시질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해 볼 수 있다.

후일에 이식의 손자 류〔李留,이신하(李紳夏)의 아들〕도 백아곡에 살면서 동계기에 적혀있는 조부의 뜻을 기려 경한정(耕閒亭)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 정자도 언제 없어졌는지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경지정리가 된 쌍학2리 삼선당마을 앞들을 흐르던 작은 개울이 있었고 이 개울가 바위에 ‘耕閒’이라는 암각문이 있었음은 마을사람들로부터 구전으로 확인할 수 있었으나 40여 년 전 경지정리를 하면서 흙에 덮여 논바닥이 되어있어 확인하지는 못했다. 조부가 하고 싶던 일을 손자가 기려 정자를 세우고 글씨까지 새겼던 마음이 갸륵하다.

동계8경 중 제2경은 부연(釜淵)이다. 부연은 ‘가마소’와 같은 뜻으로 산골의 개울에는 흔히 만들어 지는 자연 못이어서 부연 또는 가마소란 소의 이름은 흔하다. 이곳의 부연은 ‘현연(玄淵)’으로도 불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아마도 소전체가 검게 보여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든다. 동계기에 나오는 부연으로 인해 후에 이 마을이 ‘부연리’라는 지명으로까지 쓰였고, 후일에는 그 이름이 ‘귀거연(歸去淵)’으로도 불렸으며 지금은 없어졌지만 택당의 위패를 모셨던 부연사(釜淵祠)라는 사당도 있었다. 부연에 관한 동계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계류(溪流)의 동쪽이 바로 부연(釜淵)이다. / 부연은 넓이가 10여묘쯤 되는데, / 층암(層巖)을 휘돌아 감싸고 있다. / 층암위로 올라가면 땅이 평평한데 점유한 위치가 치우치지 않아 / 멀리 바라보면 유장(悠長)한 느낌이 든다. / 담(潭)의 서쪽에는 쌍석(雙石)이 대치하고 있는데, / 그 모양이 마치 규(珪)를 꽂아 놓은 것과 같으며, / 그 터진 틈 사이로 화훼(花卉)가 가득 채워져 있다. / 옛날에 노사 문연령(魯斯 文延齡)이 / 이곳으로 물러나와 정자를 짓고 살다가 / 10년 만에 죽었는데, / 아들이 없어 그 정자가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 그러다가 지금에 와서는 이청풍 행건(李淸風 行健)의 별장으로 소속되었는데, / 그 고송(古松)과 단풍 숲을 / 동네 사람들이 함께 즐기고 있다.”

앞에서 설명한 조적대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지금은 그 바위의 일부만 확인할 수 있듯이 처지는 부연도 비슷하다. 층암을 휘돌아 감쌌던 부연은 흙으로 메워져 높고 평평한 밭이 되었고 현재의 물길 쪽 층암만이 그대로 남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부연의 서쪽에 있는 쌍석바위 바로 위쪽에 쌍학교가 개울을 가로질러 놓여 졌고 그 다리의 동단 교각이 기점이 되어 쌍석바위를 거처 부연의 물길 쪽 층암까지 직선으로 둑이 쌓였기 때문이다.

다만 층암위의 평평하고 치우치지 않아 정자를 지었었다는 땅은 밭으로 개간되어 경작되고 있고 층암과 밭 사이에만 잡목들이 우거져 있고 귀퉁이 바위틈에 뿌리를 박은 오래된 전나무한그루가 10여 년 전쯤 벼락을 맞아 위는 파편이 되어 날아갔고 아래 부분만이 노수(老樹)의 면모를 유지하며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곳의 옛 주인은 노사 문연령(魯斯 文延齡)이었고 당시의 주인은 이청풍 행건(李淸風 行健)이며 여기에는 고송(古松)과 단풍이 아름다워 동네사람들이 함께 즐기고 있다며 동계기는 부연의 연혁과 현황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부연은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쌍학1리에 위치하고 있다. 양동면은 조선시대에 지평현에 속한 상동면이라 하였는데 석곡리(石谷里), 부연리(釜淵里), 죽장리(竹杖里)의 3개리가 있어 부연이 마을이름으로 까지 불리 운 것은 위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조적대와 부연은 동계기안에만 남아있는 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옛 모습을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동계8경중 제3경은 건지산이다. 이 산은 면의 중심부에 솟아 있는 267m의 야트막하고 동그란 산으로 비교적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면의 북부인 금왕리 이북과 남부인 석곡리 이남을 가르며 솟아있으며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새우개(조현)마을에서 정월보름에 산제를 올렸고 가뭄이 극심하면 이 산 정상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산의 모양이 사발을 엎어놓은 듯 특별하여 지금도 양동면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는 산이다.

동계기에서는 이 산을 빼낼 건(搴)에 지초 지(芝)자를 써서 ‘搴芝山’이라 썼다. 그러나 지금은 이 산을 ‘建指山’이라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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