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누비기 Ⅱ-영춘 이복재 경기도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사천장은 현기가 경영하던 전장의 별서이름으로 사천과 사천장경영의 중심이 되던 곳으로 볼 수 있다. 백운봉 하 골짜기아래이면서 너른 전장이 내다보이는 곳에 그려진 사천장팔경도와 오봉의 글 내용으로 보아 사천장이 있던 위치는 지금의 옥천면 용천리임에 틀림없어 보이지만 정확한 위치는 아직까지 확인할 수 없다.

사천장에는 만권의 책이 구비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이호민 부자(父子)의 학문과 지위, 경제력 등을 가늠해 볼 수 있으며 사천장이 양근과 인근지역의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천장은 병자호란 때 적군의 주둔지가 되었다가 폐허가 되고 만권의 장서 역시 소실되고 말았다. 이 같은 사정을 종합하여 볼 때 사천장은 1613년경부터 병자호란기인 1636~1637년 사이 약23~24년간 존재했다가 소실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사천장팔경은 지명과 자연현상 등을 조합하여 지정되었다. 용수청람에서의 용은 용문산, 운봉호월에서의 운봉은 백운봉, 사사심진에서의 사사는 사나사(舍那寺), 침교권경에서의 침교는 당시 사천에 놓았던 다리, 문암동천의 문암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계곡으로 지금의 사나사계곡 일대, 건지송백의 건지는 옥천리의 건지산, 군성효각의 군성은 양근군읍치인 갈산일대, 제탄모범의 제탄은 굽여울이라고도 부르는 남한강의 여울이름인 것이다.

사천장팔경 중 용문산, 백운봉, 사나사, 문암, 건지산, 양근읍치, 제탄 등은 현재의 위치를 확인하거나 비정할 수 있는 곳이지만 침교는 아니다. 사천장팔경도에는 지금의 사탄천을 확실하게 그리고 그 오른편에 거리를 두고 침교가 표시돼 이름이 적혀있다. 따라서 사탄천을 건너기 위해 놓았던 다리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침교에 관한 이정구의 표현을 다시 보자.

“다리 아래 큰 들판에는 농군들이 논밭에 가득하였으니, 이것이 침교(砧橋)인가.”

사천장과 건지산 위쪽 중간부분 넓은 전장의 중심부에 사탄천보다 작은 시내를 그리고 “砧橋”라 적었으며 일하는 농부, 쟁기질하는 농부와 소 등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실제로 사탄천으로 흘러들어 합류하는 시내는 신복천과 옥천저수지에서 흘러드는 작은 시내 등 둘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림에 그려진 작은 시내는 하나뿐이다. 다리아래 큰 들판에 농군들이 논밭에 가득하였다는 월사의 글로보아 짐작컨대 침교는 신복천에 놓였던 다리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호민 부자가 사천팔경이라 하지 않고 사천장팔경이라 한 것은 침교권경 등에서 엿볼 수 있다. 사천일대의 아름다운 경치도 팔경선정의 조건이지만 시세(時勢)에 따라 은둔을 택하면서도 이호민가의 학문적ㆍ문화적역량을 은근히 유지 또는 과시하고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경제력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보다 넓은 전장을 운영하고 권농을 통하여 이를 경영하여 경제력을 확보할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양근효각과 제탄모범도 암시하는 바가 있다. 사천장팔경도의 그림 중 절반은 사천이고 절반은 양근군을 그려넣은 점과 양근읍치에서 나는 새벽의 뿔나팔소리〔양근효각〕와 남한강의 제탄〔제탄모범〕을 팔경의 일부로 삼음으로써 비록 은둔을 택하여 전장을 경영하지만 보다 넓은 지역을 사천장팔경의 범주에 넣어 보이지 않는 역량과 영향력을 과시한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1625년 택당 이식은 사천첩에 다음과 글을 쓰고, 시문을 붙였다.

“(앞부분 생략) 나의 거처는 용문산(龍門山) 동쪽에 있고 사천(斜川)은 서쪽에 있다. 그리고 내가 주인인 사군공(使君公)과 친하게 지냈는데, 전후에 걸쳐 서로들 세상을 피해 은거한 시기도 대략 비슷했다. 그런데 이른바 사천첩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일찍이 화운(和韻)할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그것은 나의 졸렬한 재주를 감히 선보일 수 없었던 이유만이 아니라, 그때 당시에는 실경(實景)에 심취하여 한껏 즐기고 있느라 글을 생각할 겨를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지금 시중(市中)에 온통 정신을 뺏기고 있는 와중에서 그 도화(圖畫)를 보고 또 거기에 제(題)한 제공(諸公)의 시편들을 보게 되었으니, 어찌 개연(慨然)한 심정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운자(韻字)에 맞추어 나의 뜻을 전달하는 일을 마침내 그만둘 수가 없었다.”

택당이 동계기안에 동계팔경을 노래하고 동계팔경도를 그린 해는 1824년쯤이다. 현기는 1613년 이전에, 택당은 이보다 늦은 1618년에 양평에 은둔한 것으로 보아 현기의 양평입향이 5년 정도 빨랐던 것 같다. 또한 현기가 사천장팡경을 지정한 것도 택당이 동계팔경을 지정한 것보다 빨랐다.

현기가 아버지의 유고(遺稿)를 찍어 배포하려고 하면서 편집하고 교정하는 일을 택당에게 요청하여 완성한 책이 『오봉집(五峰集)』이다. 이 책의 끝에 쓴 택당의 유고후제〔遺稿後題; 오봉(五峯) 이호민(李好閔) 상공의 오봉집 유고 뒤에 쓴 글〕라는 글을 통해 택당과 이호민부자와의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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