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특집- 변준호 양평 독립운동가
“해방 후에도 귀국 못해, 후손들 가슴에 못 박아”

올해로 8‧15 광복 72주년을 맞았다. 일제치하의 암울했던 시기, 수많은 젊은이들이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의향’으로 이름 높은 양평 또한 몽양 여운형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활동을 펼쳤다. 본지는 광복절을 맞아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양평의 독립운동가 변준호 선생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의 손자이자 광복회 양평‧이천연합지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변도상씨의 증언과 지난 2015년 ‘한국근현대사연구 2015년 봄호 제72집’에 실린 박준현(서강대 사학과 박사과정)씨의 연구논문인 ‘재미한인 변준호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변준호 선생의 유일한 단독 연구)를 참조했다.

미주 지역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동료들과 찍은 사진. 둘째 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변준호 선생.

갈산시장 대상의 아들, 독립운동 투신

변준호 선생은 1895년 11월 당시 양평군 갈산면 양근리(현 양평읍 양근리) 304번지에서 변세영‧이희 부부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변 선생의 부모는 갈산시장에서 십여개의 상가를 거느린 대상이었다. 일제치하의 암울한 시기였지만 부유한 가정환경 덕분에 어려서는 한학을 수학하고, 이후 공립보통학교, 간이농업학교, 경신중학교 등에서 공부했다.

당시 양평은 의병활동이 활발했는데, 특히 1907년 용문산을 근거지로 한 권득수‧조인환의 의병조직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펼쳤고, 이것이 청년시절 변 선생에게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변 선생은 1911년 혼인해 아들(변홍철)을 낳았고, 아들이 3살이 되던 1916년 돌연 중국 남경으로 망명했다. 박준현의 연구논문에는 변 선생의 남경 망명의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유학을 떠난 것으로 짐작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의 손자인 변도상 선생은 “당시 할아버지(변준호 선생)가 집안에 아무런 말도 없이 상당한 돈을 가지고 사라졌다는데, 다들 독립운동 하러 떠난 것으로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미주 한인사회서 두터운 신임 얻어내

중국 남경으로 망명했던 변 선생은 1년 뒤인 1917년 8월 다시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이후 그의 행보는 당시 미국의 통합 한인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이하 국민회)가 발행한 ‘신한민보’를 통해 드러난다. 변 선생은 1919년 샌프란시스코 지방회의 서기를 맡았는데 이후 행보에서도 보여주듯 사람을 폭넓게 사귀고, 신임을 얻는데 상당한 수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9년 국내에서 광범위한 3‧1운동이 전개되자 미주 한인들도 이를 지원하는 여러 단체를 조직했는데 변 선생도 이 시기 무장투쟁을 지향한 ‘청년혈성단’에 가입했다. 그러나 청년혈성단은 오래 지나지 않아 활동이 흐지부지됐고, 변 선생은 활동이 두드러진 ‘흥사단’에 가입해 무장독립투쟁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갔다.

1920년대 변 선생은 웨슬리언 대학(Wesleyan University), 노스웨스턴 대학(Northwestern University) 등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이 대학들은 미국 공산당의 주 활동지였던 시카고와 가깝고, 한인유학생들이 많이 다닌 학교였다. 변 선생은 이곳에서 사회주의 토론회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유학생들이 조직한 고려학우회 산하 ‘재미한인사회과학연구회’(이하 연구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동시에 흥사단 중서부지부 재무담당자로 활동했다. 즉, 성향이 다른 두 단체에서 큰 마찰 없이 활동을 지속했고, 특히 중요한 자금을 관리했다는 사실을 종합하면 당시 미국내 한인사회에서 변 선생의 신임과 경영 감각이 상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변준호 선생(앞줄 오른쪽에서 세번째)이 미국에서 벌인 반일시위의 한 장면.

사회주의, 독립의 방편으로 여겼을 뿐

그러다 1933년 국민회 원로들은 사회주의 노선을 주창한 연구회의 활동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국민회는 연구회가 한인사회 내 분란을 일으키고 해를 끼친다며 연구회 학생들을 이민국에 고발했다. 이 사건으로 연구회는 급속도로 쇠퇴했고, 변 선생이 뉴욕으로 이주한 1935년 이후 완전히 와해됐다. 하지만 변 선생은 국민회에서 출당되거나 한인사회에서 배책당한 흔적은 나타나지 않는다. 종합하면 변 선생은 국민회와 흥사단에서 활동했음에도 사회과학연구회에도 참여하며 사회주의를 독립운동의 한 축으로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초창기 한인 운동가들이 민족주의에 한정된 것과는 달리 변 선생은 젊은 유학생들의 사회주의 노선 또한 받아들이면서 미주 한인사회 내의 세대간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변도상 선생은 “할아버지는 국내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이 좌우합작을 주창했듯이 미국에서 그러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안다”며 “사회주의자로 낙인찍힌 할아버지의 명예가 회복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변 선생은 이후 뉴욕으로 근거지를 옮겨서도 국민회, 흥사단 활동을 이어감과 동시에 진보성향의 젊은층과도 두터운 관계를 맺었다. 또한 중일전쟁을 기회로 중국과의 동맹에도 앞장섰다.

1942년 중국 등지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을 후원하는 의용대후원회가 조선민족혁명당(이하 민혁당)으로 전환하면서 변 선생이 위원장을 맡았다. 변 선생은 미주 한인 단체의 연합회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참여하면서 무장투쟁이 우선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1944년 11월 민혁당 기관지인 ‘독립’에 실린 변 선생의 사설을 살펴보면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예를 들면서 조선 역시 무장투쟁을 전개하며 연합국과 함께 일본에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공산졍치도 사용할 수 잇고, 또 민주 정치도 사용할 수 잇다”고 주장해 사회주의 혁명이나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지향했다기보다 독립의 방편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냅코작전 일원으로 군사훈련 참여

변 선생은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광복군을 지원해 최종적으로 국내진공작전을 시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견지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이후 미국 정보기관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가 진행한 냅코작전(NAPKO Project)에 참여하는 것으로 더욱 부각된다. 냅코작전은 태평양전쟁 당시 미국 정부가 미주 내 한인들을 한반도에 침투시켜 정보수집과 국내 지하조직과 연결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계획한 프로젝트다. 당시 꾸준하게 무장투쟁을 주창한 변 선생을 미 정보부는 작전에 적합한 인물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변 선생은 1945년 1월 특별훈련소에서 정탐과 첩보에 관한 군사훈련을 받았다. 냅코작전은 실행 직전까지 갔으나 8월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 선언되면서 불발로 끝났다. 당시 50세가 넘었던 고령임에도 자신의 몸을 던져 조국해방에 이바지하고자 한 그의 마음가짐이 어떠했는지가 잘 드러난다.

이승만 정권 견제로 귀국 못해

변 선생은 해방 이후에도 귀국하지 못하고 미국에 머물러야 했다. 이는 이승만 정권 때문이다. 변 선생은 사설을 통해 미군정의 정당활동 제한, 친일파 등용 등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승만은 자신에 대한 비판이 커지자 해외 한인들에 대한 감시와 입국 방해를 명령했다. 당시 미국 총영사는 여권발급 제한 등으로 이를 실행했다.

변 선생은 ‘독립’에 꾸준히 미군정을 비판하는 글을 게재하면서 반미노선을 견지했다. 미군정의 정책 실패와 분단이 가시화되는 현실에 대한 절망감 때문으로 보인다. ‘독립’이 폐간된 1956년 이후 변 선생의 활동은 파악되지 않는다. 변 선생은 1966년 2월20일 71세의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박준현은 그의 논문에서 “변 선생은 생의 대부분을 타지인 미국에서 보내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며 “미주지역에서 무장투쟁 노선을 전파하고, 이를 지지하는 진보적 한인들의 활동을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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