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누비기Ⅱ-영춘 이복재 경기도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양평군내의 장시도 인구의 집중도, 교통 등 접근성, 군이나 읍면소재지·두물머리·용문사 같은 관광지, 지역특산물 등 거래 품목의 다양성, 특색 있는 볼거리와 즐길 거리 등의 내방 유인 조건의 변화에 따라 변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평의 장시 중 가장 오래 지속적으로 성시를 이루던 큰 장시로 양평과 여주의 2개 고을에 걸쳐 열려 양평은 물론 인근의 여주와 이천, 강원도 일부지역 주민들도 이용하여 유명했던 곡수장은 1988년에 폐지된 것으로 양평통계연보에 적혀있다. 1910년 당시 양평군수 정원모는 지평의 옛 영화를 되살리려 지평면 소재지에 월하시장을 개설하면서 전통적으로 유지하던 곡수장의 4·9일 개시일까지 빼앗아 월하시장의 개시일로 하고 2·7일로 변경 당했던 수모에도 불구하고 월하장을 폐지시키는 저력을 발휘하며 건재했던 곡수장이다. 그러나 인근인 여주 대신면에 대신장이 1955년에 새로 생기고 이전과 명칭변경을 통해 복설을 거듭했음에도 성공하지 못하던 지평장도 1963년에 복설되어 활성화되는 등 장시를 둘러싼 여건들이 거센 파도처럼 도도히 몰려오자 결국은 무릎을 꿇고 폐지되고 말았다.

1770년에 간행된 『동국문헌비고』, 「시적고」에 전국 장시가 처음으로 조사·기록되어 이 책에는 1064곳이 적혀있다. 그 중 한곳으로 양근에는 좌곡장이 적혀있고, 『임원경제지』에는 가좌곡장으로 명칭이 바꾸어 적혀있으며, 편찬시기의 하한을 1863년(철종 14)으로 보는 『대동지지(大東地誌)』에는 다시 좌곡장으로 적혀있으며 개시일은 세 책 모두에 2·7일로 적혀있는 좌곡장 또는 가좌곡장(이하 ‘(가)좌곡장’)이 있었다. 1700년대 후반에 생겨 1863년 이후에 없어졌다면 약 100년 이내의 기간 동안 존속되던 장시였다.

양근읍내인 갈산에 갈산장이 처음생긴 것도 1700년대 후반 무렵이다. 그러나 갈산장은 열리기 시작한 지 60년이 채 못 되어 폐지되었던 적이 있었다. 갈산장의 10리 이내에 사탄장이, 15리 이내에 (가)좌곡장이 있었기에 사람들이 기존에 이용하던 가까운 두 장을 이용하고 새로 생긴 갈산장을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즉 (가)좌곡장은 지금 옥천면의 사탄장과 함께 갈산장을 폐지시킬 영향력이 있을 만한 장시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가)좌곡장이 섰던 위치가 어디인지 밝히지 못하고 있다. 전국의 장시를 조사하여 기록한 『동국문헌비고』이후 (가)좌곡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열렸던 장터의 위치가 확인되지 않은 장시다.

(가)좌곡장은 『임원경제지』에 “在郡南十五里(재군남십오리)”라고는 적혀있다. 군(郡;여기서 군은 양근군 소재지인 갈산을 말하는 것임)에서 남쪽인 지금의 강상면(당시 남시면, 이하 ‘강상면’)이나 강하면(당시 남종면, 이하 ‘강하면)에 섰던 장시임은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당시 강하면에는 상심장(上心場)이 섰고, 상심장은 “在郡南二十五里(재군남이십오리)”라 적혀있어 상심장과 읍내사이 25리 안에 또 하나의 장시가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은 성립시키기 어렵다. (가)좌곡장은 강상면 어디에 섰던 장시라는 추론이 가능해 지는 이유다.

장시의 명칭은 그 장시가 열리는 마을의 이름을 앞에 넣어 불렀던 것이 원칙처럼 굳어 있었다. 그렇다면 강상면의 지명 중 ‘좌곡’ 또는 ‘가좌곡’을 찾으면 위치가 확인된다. 그러나 강상면 어디에서도 이런 지명은 찾아볼 수 없다. 지금까지 여러 학자와 향토사학자들이 범위를 강상, 강하 2개면으로 확대하여 찾으려 노력했지만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주목되는 곳이 있다. 필자가 강상면과 강하면의 지명을 세밀히 짚어보다 발견한 곳으로 강상면 세월리의 세심(洗心)마을이다. 세심마을은 일명 ‘심벼루’라고 하며 세월리에서 으뜸인 마을로 앞에는 파내탄(波乃灘)이라는 여울이 있다. 이 마을에는 ‘장터거리’라는 곳이 있다. 세심 동쪽마을로 예전 강벼루에 배를 대고 숙식을 하며 주막에서 물물교환이 있던 곳이라고 한다.

파내탄은 심벼루 또는 셈빼루, 심바라라고도 부른 세심마을 앞 여울로 하류의 대탄(大灘;한여울)보다 더 위험한 여울이어서 심벼루나루는 강을 건너는 도선기능은 없었지만 항구와 마찬가지 역할을 하여 많은 배들이 쉬었다가 가던 곳이었다고 한다. 또한 이곳은 인근에서 벌채한 장작 등 땔감을 서울로 공급하는 나루 중의 한곳이었고 기름, 소금, 새우젓, 기타 가정에서 쓰는 물품 등이 들어와 하역되어 인근지역으로 이동되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기능은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어져 이 나루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색시를 두고 술도 파는 주막집도 있었다고 한다(이상 『양평군지』,2005,중권 참조 및 인용). 자연발생적으로 장이 설만한 조건들을 갖추었던 곳으로 추정되지만 그러나 이 마을이 (가)좌곡장이 열리던 곳이 맞는지 확인할 길은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서민들의 삶을 대표하는 만남의 장으로 물품은 물론 정보교환의 현장으로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의 애환이 깃든 장시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용하는 사람들과 거래되는 품목은 물론 그 장소와 시기가 바뀌고 부침(浮沈)과 성쇠(盛衰), 개시와 폐지를 거듭했다. 지역 장시의 변천 과정에 관한 자료발굴과 연구를 통하여 지역사를 정립하고, 문화콘텐츠로 활용하는 일을 서둘러야 한다.

(지난호 본란에 게재한 ‘양평의 장시’1~3 내용 중 ‘폐시(閉市)’는 서던 장이 없어짐을 뜻하는 ‘폐지(廢止)“의 뜻으로 썼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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