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누비기 Ⅱ-영춘 이복재 경기도 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1830년에 발간한 『임원경제지』이후 양평의 장시가 적혀있는 문헌은 1842년이나 1843년에 발간된 것으로 보이는 『경기지(京畿誌)』와 1871년 발간된 『경기읍지(京畿邑誌)』, 1863년이 발간 하한(下限)인 『대동지지(大東地誌)』, 1894.11~1895.2 사이에 간행된 『기전읍지(畿甸邑誌;양근과 지평 중 양근군읍지만 잔존)』, 1899년 간행된 『양근읍지(楊根邑誌)』 등이 있다. 이 문헌들을 통해 1830년 발간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이후 1890년대 말까지의 70여 년간 장시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양근의 장시에 관하여는 『경기읍지』ㆍ『기전읍지』ㆍ『양근읍지』 적힌 내용이 같은데 우천장(牛川場)·상심장(上心場)·사탄장(沙灘場)·미원장(迷源場)·읍내장(邑內場) 등 5개 장시의 명칭과 위치, 그리고 개시일이 적혀있다. 다만 이들 지리지보다 50년 이상 앞서 간행된 『경기지』에는 읍내장에 관한 기록이 없다. 지평의 장시에 관해서는 『경기읍지』에만 적혀있는데 읍내장(邑內場)·곡수장(曲水場)·상서장(上西場)·상동장(上東場)·북면장(北面場) 등 5개 장시의 명칭과 위치, 그리고 개시일 등이 적혀있다.

이들 문헌의 장시에 관한 기록을 근거로 변동내용을 보면 양근에서는 지금의 양평읍에 읍내장이 1894년 이전에 3·8일을 개시일로 하여 부활하여 지금 옥천면의 사탄장과 한동안 병존하였고, (가)좌곡장은 폐시되었다. 또한 우천장과 미원장은 이후 다른 고장으로 편입됐기 때문에 논외로 하고, 다만 지금의 개군면에 위치하며 개시일이 5·10일이었던 신은천장에 관한 내용은 여주의 장시에 관한 기록을 참고해야 하나 위에 열거한 지리지에 적혀있지 않아 이 기간 중 폐시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지금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볼 때 1893년 전후 양근에는 상심장·사탄장·읍내장 등 3곳의 장시가 있었고, 두 장시간의 거리가 짧았던 사탄장과 읍내장의 개시일이 3·8일로 같았음은 사탄장의 폐시를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지평에서는 읍내장이 개시일을 3·8일로 하여 부활하였으며, 곡수장은 그대로 유지된 채 지금의 용문면 다문리의 전곡장은 상서장으로, 지금 양동면의 부연장은 상동장으로, 지금 청운면의 유평장은 북면장으로 각각 면의 명칭변경에 따라 장시의 명칭도 바뀌었다. 다만 읍내장은 “매삭3일8일개시금무(每朔三日八日開市今無)”, 상동장은 “재부연매3일8일금무(在釜淵每月三日八日今無)”라고 적혀있어 읍내장과 상동장은 1871년 『경기읍지』 발간 당시에는 명목만 유지한 채 서지 않고 있었었던 것으로 적혀있다. 상동장은 명맥을 유지하고 읍내장이 부활되고 되긴 하였으나 곡수장이나 상서장과 거리가 가깝기 때문으로 보인다.

양근과 지평의 읍치 두 곳 모두에 장시가 부활되었음은 인구가 읍치를 중심으로 늘어났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또한 양근은 나루터를 중심으로 3곳으로 줄어들어 배를 이용하여 보다 먼 거리를 이동하며 장을 이용했던 결과이며, 지평은 전체 숫자는 한곳이 늘었으나 개시하는 장시의 수는 오히려 줄어들어 장시의 규모나 이용거리에 따른 자연조정의 결과로 보인다.

1900년대 초부터 양평의 장시는 교통수단의 발달과 면리제의 정착에 따라 크게 변화하였다. 철도와 도로 등 육상교통의 발달에 따라 종전의 주 운송수단이던 배를 이용한 수상교통(水上交通)이 급격히 쇠퇴함에 따라 나루터인근의 장시는 줄어들거나 없어지고 역과 도로분기로 등이 있는 교통결절점이나 면소재지에 새로운 장시가 열렸던 것이다.

1900년대 초의 양평장시변화는 대한제국시대인 1906년 일본농상무성이 발간한 한국의 농업에 관한 조사보고서인 『한국토지농산조사보고(韓國土地農産調査報告)』, 1910년 야마구치(山口精)가 편찬한 한국에 관한 조사자료인 『조선산업지(朝鮮産業誌)』, 1924년 조선총독부 서무부 조사과에서 발간한 조선의 시장에 대한 서적인 『조선의 시장』, 1925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시가지와 상권』, 1929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의 시장경제』 등에 적혀있다.

양근과 지평의 두 군을 통합하여 양평군이 된 1908년 무렵과 1939년 4월 청량리~양평간의 중앙선철도가 개통되어 운행하기 이전까지 양평군내 장시의 변화를 살펴보면 1906년에는 양근의 상심장이 남중장으로 명칭이 바뀌면서 개시일 또한 4·9일로 바뀌었다가 1910년경 폐시되었고 사탄장도 그 무렵 폐시되었으며, 1924~26년에는 개시일을 2·7일로 하여 지금의 양서면에 양수장이 새로 개시되었다. 또한 지평의 용두장이 개시일을 2·7일로 하여 새로 생기고 북면장은 적혀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북면장이 폐시되면서 장소와 개시일도 달리하여 새로 개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용두장은 1929년 조사에는 적혀있지 않아 다시 폐시되는 등 개폐가 잦았다. 이 무렵 장시의 주요 거래품목인 쌀을 비롯한 곡류와 어물, 나물과 약제, 소(牛)중에서도 소의 거래여부나 물량이 장시의 성쇠에 영향을 미쳤음을 용두장의 예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양평의 3·1운동은 1919년 3월10일 서종면을 시작으로 4월11일 지평면과 개군면민들이 곡수장터에 모여 마지막을 장식했다. 2005년 발간된 『양평군지』와 2014년 발간된 『양평3·1운동사』 등에 의하면 일부 면단위에서는 장이 열리는 날 만세시위를 벌인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에 따르면 개시일 등이 앞에서 밝힌 날짜와 일치하지 않는다. 

저작권자 © 양평시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