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마을, 왜 만들어야 하는가> 성종규 서종면 주민자치위원회 위원장

아름다운 마을을 찾아가는 여행 58

 

도자기는 역시 백자(白瓷)가 맛이다. 일본에서 백자가 구워지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직후부터다. 순전히 조선인 이삼평(李參平)의 덕이다. 이 점은 일본인들도 아주 분명하게 인정한다.

조선인 이삼평(李參平). 충남 공주시 반포면 출신의 조선 도공. 일본 이름으로 가나가에 산페이(金ヶ江三兵衛). 임진왜란은 명나라를 정복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되었지만 전쟁이 진행되면서는 결국 ‘도자기전쟁’이라고도 불릴 만큼 일본은 도자기와 도공을 전리품으로 챙기기에 급했다. 그들로서는 만들 생각조차 못했던 아름다운 도자기들에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수많은 조선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는데, 사가번(佐賀藩)의 번주(藩主)로서 출전했던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는 일본의 보물이 될 이삼평을 손에 넣은 것이다.

도공의 기질을 버리지 못한 이삼평은 아무데서나 구하기는 어려운 백자토를 구하기 위해 사가현 일대를 뒤졌고, 결국 아리타 마을 근처의 이즈미야마(泉山)에서 백자토를 발견했다. 1616년 물 좋은 시라카와(白川) 상류에 가마를 짓고 일본 최초의 질 좋은 백자를 만들었다. 그것은 일본으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유럽의 기술을 받아들이기 위한 재원을 마련하는데 도자기 수출이 상당한 역할을 한 것을 감안하면 일본의 역사에 미친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삼평 기념비. ‘도조이삼평비(陶祖李參平碑)’라고 쓰여 있다.

그 때부터 일본에서 가장 질 좋은 도자기는 단연 아리타 도자기였고, 아리타 도자기의 총칭을 ‘아리타야키(有田焼)’라고 부르거나, 혹은 유럽으로의 주요 수출항구가 약 12㎞ 떨어진 이마리(伊万里)였기에 ‘이마리야키’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마리에도 독자적인 가마촌이 있으나 아리타와 이마리 도자기는 함께 이웃사촌이다.

그 모든 후세의 도자기들이 모두 이삼평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현재 아리타와 이마리에는 150개 이상의 도요(陶窯)와 250개 이상의 도자기 상점들이 있는데, 말하자면 모두 이삼평의 후예들인 셈이다. 일본은 이러한 사실을 숨길 수 없기에 공식적으로 이삼평을 추모하고 있다. 이삼평을 도조((陶祖)로 칭하고, 아리타 뒷산에 토잔신사(陶山神社)를 열어 이삼평을 도자기의 신으로 모시며, 신사 뒤편 산의 중턱에 기념비를 세우고 매년 5월4일 행정책임자들과 지역도자기상공업자, 한국 영사 등이 모여 도조제(陶祖祭)를 지낸다. 그리고 도조제를 마지막 날로 맞추어 일주일간 아리타도자기축제를 개최한다.

아리타 여행은 일부러 도자기축제에 맞추었다. 아리타 도자기축제는 일주일간 약 200만명의 국내외 여행객이 방문한다고 한다. 엄청난 도자기 시장이다. 약 2㎞에 걸친 축제 시장은 차량을 전면 통제한 채로 2차선 도로가 모두 사람들로 메워졌다.

이삼평 기념비에서 바라본 아리타 마을.

토잔신사와 이삼평기념비는 사람들 틈을 헤치고 도자기 진열대를 기웃거리며 2㎞를 통과한 아리타역의 정반대편에 있었다. 토잔신사는 다른 신사들과는 달리 신사 정면을 오르는 계단부터 도자기로 꾸며져 있다. 올라서니 내 키 만한 도자기 청화백자분들이 신사를 꾸미고 있었다. 신사 앞의 안내판 또한 대부분 이삼평에 대한 얘기다.

“(전략) 그 후, 이 제조기술은 수많은 도공들에 의해 면면히 계승되어 아리타 도자기의 오늘의 번영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이삼평공은 아리타 도자기의 시조일 뿐만 아니라 일본 요업계의 대 은인이다. 오늘날도 도자기 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은 이 선인이 남긴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그 공덕을 높이 받들어 존경하고 있다.”

일본어 안내판뿐만 아니라 한국어로 번역된 안내판까지 있다.

그러나 도자기축제의 그 시끌벅적한 거리를 지나 오른 산 중턱의 이삼평 기념비에는 아무도 없이 바람과 구름만 흐르고 있었다. 며칠 있다가 도조제를 지내려는지 간이 그늘막 아래 접이식 의자가 20여개 가지런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이삼평기념비에서는 아리타마을이 통째로 내려다보인다. 이삼평은 먼 타국에서 홀로 자신이 만들어낸 아리타의 기적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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