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마을, 왜 만들어야 하는가> 성종규 서종면 주민자치위원회 위원장

아름다운 마을을 찾아가는 여행 56

 

전통적 건조물군(建造物群) 보존지구와는 직접 관련은 없지만 나가사키를 여행하면서 느낀 별다른 감상이 하나 있어서 나누어 보려고 한다. 구로바 정원이나 오오우라 천주당 등 아름다움으로 인정받은 세계유산과는 달리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으로써 유네스코로부터 지정받은 세계유산들에 관한 것이다.

일본은 2015년에 일본 전역에 존재하는 1850년대부터 1910년대까지의 산업혁명 유산 23곳을 묶어 유네스코로부터 문화유산으로 지정받았다. 주로 근대 초기 조선소와 탄광, 그리고 소위 군함도 등의 유적이 그것인데, 그 중 8곳이 나가사키에 집중되어 있다.

대표적으로는 미쓰비시중공업 나가사키조선소 제3도크(三菱重工業長崎造船所第三船渠)와 소위 군함도이다. 미쓰비시조선소 제3도크는 1905년에 4년 동안 바다에 접한 산을 깎고 일부를 매립하여 길이 222미터, 폭 30미터, 깊이 12미터, 선박건조능력 3만톤으로 만든 동양최대의 선박 건조 도크이다.

사실 나가사키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가사키에 엄청난 산업혁명 유산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구로바엔 기념관에서 산업혁명유산 안내자료들을 둘러보던 중 나는 미쓰비시 조선서 제3도크를 사진으로 접하고 그 충격에 입을 다물기가 어려웠다.

다른 일정을 접고서라도 당장 가봐야겠다는 생각에 구글 검색을 시작했다. 그러나 충격의 실마리를 풀기는 쉽지 않았다. 비공개시설이었다. 하는 수 없었다. 기념관의 자료로라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선소에서 시작된 충격은 풀리기는커녕 점점 더해가기만 했다. 자료관의 비디오 상영관에서 군함도의 역사를 접한 것이다.

미쓰비시중공업 나가사키조선소 제3도크(비공개시설이라 사진은 나가사키시 관광사이트에서 따왔다.)

군함도! 군칸지마(軍艦島)!

우리나라 웹 사이트에서 군함도를 검색하면 올해 개봉될 예정인 황정민 주연의 영화 ‘군함도’의 정보가 우선 나온다. 영화의 소개글은 ‘일본의 군함도에 강제 징용되어 탄광에서 일하다가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하는 조선인들의 이야기’라고 소개되어 있다.

군함도의 본래 이름은 하시마섬(端島)이다. 메이지유신 직후 일본의 근대적 산업발전 과정에서 주요한 화력원료였던 석탄이 해저에 대량 매장되어 있는 것이 알려져 무인도였던 하시마섬이 탄광으로 개발되기 시작한다. 본래의 섬은 3㏊ 정도의 탄광산이었는데, 석탄 채취를 위한 주거지와 편의시설 등을 짓기 위해 섬 주변을 간척하면서 6㏊ 정도로 커졌다. 간척하면서 섬 둘레를 수직으로 호안제방을 쌓고, 섬 위에 광부들의 주거지가 아파트로 건축되면서 멀리서 보면 한 척의 군함같이 생겨서 속칭 군함도가 되었다.

군함도는 6㏊ 정도의 섬 안에 한 때 5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았다. 학교도 있고 영화관까지 있었다고 한다. 인구밀집도가 높은 만큼 주거지는 고층 아파트를 지어 해결했다. 1916년에 7층의 철근콘크리트조 집합건물이 군함도에 건설된 것이다. 상영되는 비디오에 담긴 군함도의 유적은 실로 충격적이고 엄청났다. 1960년대 들어 석유가 등장하자 폐광되어 갔는데, 폐광과정에서 조선인 강제징용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살해가 자행되었다는 점이 우리에겐 한(恨)이다.

군함도(나가사키시 관광사이트에 게재된 사진이다.)

그러나 나가사키 여행에서 마음이 너무나 아팠던 것은 강제 징용인들의 고통뿐만이 아니었다. 일본인들은 스스로 ‘산업혁명’을 했다고 자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쇄국정책을 쓰고 있던 1905년에 3만톤의 배를 만들었고, 1916년에 이미 7층짜리 철근콘크리트조 아파트를 지었다.

나가사키의 밤에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왜 스스로 산업혁명을 치를 기회를 놓치고 이들에게 식민지가 되었던 것일까. 쇄국과 개항은 무엇이 옳았고, 왜 옳은 길을 선택하지 못한 것일까. 일본은 저토록 물질적으로 산업혁명을 치르고 왜 제국주의의 길을 들어선 것일까. 물질적 근대화는 정신적 근대화와 왜 괴리되어 있었던 것일까. 생각의 차이란 무엇이며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등등 말이다.

나가사키는 내게 오래된 것의 아름다움과 함께 역사의 회한과 안타까움과 충격과 의문을 동시에 던지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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