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규(서종면 주민자치위원장·변호사)

언젠가 외신 보도사진에서 캡쳐해서 지금도 휴대폰에 간직하고 있는 사진이 하나 있다. 오바마가 집무실에서 참모들과 회의를 하는 사진인데, 대통령인 오바마는 오히려 소파를 짚고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반면 참모들은 소파에 기대어 앉은 채 탁자에 다리까지 올리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어제는 재미있는 짧은 동영상을 하나 봤다. 미국 부통령 마이크 펜스가 군인가족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감사의 연설을 하던 중 팔을 벌려 제스처를 취하다가 부통령의 팔꿈치에 살짝 맞은 어린 아이가 부통령에게 당당히 “당신은 내게 사과해야 한다”고 따져 사과를 받는 장면이었다.

새 정부가 출범했다. 사람들은 말한다. “대통령이 바뀌었으니 세상이 바뀔 것이다” “대통령이 바뀌었으니 일자리도 묵은 숙원도 다 해결되겠지” 그러나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세상이 쉽게 바뀌진 않는다. 마이더스의 손이 아니다. 우리가 한 두 해 살아왔나.

며칠간의 새 정부의 분위기를 보면 통합과 소통, 그리고 황제권력과 권위의 탈피 등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느 대통령이든 출범 초기에는 누구나 상당한 기대를 주었다. 임기 초기에 가방을 직접 들고 다니며 ‘보통사람’이라고 내세웠던 노태우 대통령도 생각난다.

오해하지 말자. 통합과 소통, 권위가 해소되는 사회는 결코 대통령 한 명이나 그 측근들만이 만들어 낼 순 없다. 사회는 다수의 대중이 만든다. 새 정부는 그들이 잘해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천만의 촛불이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들이 만든 것이다.

통합은 어떤 사회와 사물의 양쪽을 유연하게 결합하는 것이다. 통합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서로 반목한 양쪽을 손을 잡게 하는 것이다. 그 어려운 통합은 자칫 잘못하면 양쪽을 결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양쪽으로부터 모두 비판을 받게 되기가 십상이다. 그러다보면 통합을 시도하다가도 피로감에 젖어 어느 한 쪽으로 기울고 만다. 대부분의 정부들이 그랬다. 그래서 모 정치인은 “결과가 잘못되었어도 의도는 선했다고 이해해야 한다”고까지 했던가. 통합이란 결국 사회 속의 우리들 사이에서 이루어져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사회 저변의 우리들 자신이 통합의 정신을 바탕에 깔고 있지 않으면 결코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권위의 탈피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강력한 대통령을 원했다. 강력한 지도력을 원한 우리 자신들로 인해 황제권력이 존속해왔던 것이다. 아직도 강력한 지도력을 원하는 전근대적이거나 노예적인 속성이 우리들과 우리 사회 속엔 적잖이 남아 있다. 어느 날 대통령을 뽑고, 그리곤 손을 놓고 그가 내 운명을 바꿔주겠지 하며 찬양하던 속성이 황제권력을 만들어 왔다. 한편으로는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무능한 정부라고 쉽게 비판하기도 한다. 저 멀리 단상에서 서서 강력한 권위로 뭉쳐져 보이는 대통령을 우러러보고 존경하는 습관이 우리 사회에서 없어져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헌법이 정한 대통령은 한 명의 공직자이다.

잘 아는 해와 바람의 이솝우화를 회상해본다. 세찬 바람으로 벗기지 못한 나그네의 옷을 햇살이 부드럽게 벗겨내어 내기에 이겼다. 바야흐로 권위를 탈피한 지도력이 존중받는 시대가 왔다. 박정희 대통령 때만 하더라도 지도력은 무조건 강력하고 권위적인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젠 부드러운 지도력의 시대가 왔다.

그러나 부드러운 지도력은 언뜻 보기엔 약하다. 바람보다 햇살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부드러움의 포용력을 깊이 깨닫고 인내해야 한다. 사회 저변 속에 존재하는 다양성에 대한 부드럽고도 인내심 있는 관용(寬容, tolerantia)이 있어야 한다. 그 관용이 새 정부에게 뿐만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있어야 한다.

통합을 이루어내는 일, 따뜻한 공동체를 이루어내는 일, 부드러운 지도력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도록 하는 일, 그 모든 것이 우리 스스로가 사회의 저변에서 다양성과 관용을 철학으로 삼지 않으면 이루어내기 힘들다. 사회의 문화 자체가 바뀌지 않고는,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쉬운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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