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누비기Ⅱ-영춘 이복재 경기도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고려 말인 1391년(공양왕3)에 현 지경(地境)에 철장(鐵場)을 두고 감무(監務)를 두어 현감을 겸임하게 함으로써 지평현은 복현(復縣)되어 조선조에 이르게 되었다. 고려시대에 도입한 도제(道制)는 995년(고려 성종14)에 경기 이외의 전국을 10도로 나누어 시행한 이후 유명무실해졌다가 조선시대에 다시 도입되었다. 즉 1413년(태종13) 대대적인 지방관제 개혁에 따라 8도제로 바뀐 것. 이때 지평현도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고쳤으니 비로소 현감이 고을을 다스리는 곳으로 승격되었던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이때의 읍호(邑號)를 지평과 함께 지제(砥堤)로도 썼던 기록이 있다는 점이다. 지제라는 읍호는 1530년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지평현 편 군명 조에 지현(砥峴)·지제(砥堤)로 기록되어 있으나 사용 시기와 지평과 함께 겸용하였는지에 대한 분명한 기록은 없으며, 신증의 이전 기록임으로 『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된 1477년 이전부터 사용한 지평현의 또 다른 읍호로서 지평과 지제를 함께 썼을 가능성만 추측해볼 수 있는 실정이다.

다만 “1685년(숙종11) 지평현을 강상죄인 해옥의 일로 양근에 편입시켰다가 1688년(숙종14) 다시 설치 후 읍호(邑號)를 지제로 개칭했다”는 내용이 1991년 간행된 『양평군지』 464쪽에 적혀있으나 전거(典據)가 명시되지 않아 맞는 기록인지 확인할 수 없다.

지평현은 1685년(숙종11) 양근군에 편입되어 다시 폐현(廢縣)되고 만다. 이유는 강상죄인(綱常罪人) 해옥(亥玉)의 사건으로 인해서였다. 강상죄인이란 예전에 삼강오상(三綱五常)에 어긋나는 행위를 한 죄인을 이르던 말로 부모나 남편을 죽인 자, 노비로서 주인을 죽인 자, 또는 관노(官奴)로서 관장(官長)을 죽인 자 등을 이른다.(네이버 국어사전)

조선시대에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승정원에서 매일매일 취급한 문서와 사건을 기록한 일기인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기록에 의해 강상죄인 해옥에 관한 행형 처리경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685. 7.11(숙종11) 강상죄인 해옥에게 도사(都事)를 보내 나래(拿來:붙잡아 옴)할 것을 청하는 의금부(義禁府)의 계(啓), 7.11 강상죄인 해옥을 삼성추국(三省推鞫:강상죄 등 중죄를 범한 죄인을 형조나 의금부, 의정부, 사헌부나 사간원인 대간 등 삼성이 합좌하여 국문하는 추국의 한 형태)할 것을 청하는 의금부의 계, 7.14 해옥의 삼성추국에 어느 대신을 위관(委官)으로 보낼지를 묻는 승정원의 계, 해옥에 대한 삼성추국은 무고(無故)한 날을 기다려 거행(擧行)할 것인지를 묻는 승정원의 계, 해옥의 삼성추국을 위해 윤경교(尹敬敎) 등의 패초〔牌招:왕명(王命)을 받아 승지(承旨)가 신하(臣下)를 부름〕를 청하는 승정원의 계, 7.15 내일은 기우제(祈雨祭)의 재계〔齋戒,종교적 의식 따위를 치르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부정(不淨)한 일을 멀리함〕이므로 죄인의 삼성추국을 무고(無故)한 날에 거행할 것인지를 의금부에서 물었다는 승정원의 계, 7.17 해옥이 승복함, 7.18 의금부에서 해옥을 당고개(堂古介)에서 행형(行刑)했다고 아룀, 해옥을 정형(正刑)했으므로 법례(法例)에 따라 파가저택(破家瀦澤:큰 죄인의 집을 헐어 없애고, 그 터를 파서 물을 대어 못을 만드는 형벌)할 것 등을 청하는 의금부의 계.”

해옥이 저지른 강상죄는 고모를 살해한 시해고모(弑殺姑母)였다. 승정원일기에 따라 해옥에 관한 행형경과를 요약하면 1685년 7월11일 임금의 명을 받아 죄를 국문하는 등 절차를 거쳐 7월17일 해옥이 승복함으로 18일에 처형하고 파가저택, 자녀를 노비로 삼고〔子女爲奴〕, 읍호를 강등시켰으며〔降其邑號〕, 해당 고을의 수령을 파면시키는〔罷其守令〕 여러 조치가 완료되었다.

이렇게 지평현은 강상죄인 해옥의 일로 양근군에 편입되어 다시 폐현되었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 강상죄를 매우 엄히 다스렸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죄인은 사형에 처하고 처자는 노비로 삼으며 집은 부수어 그 자리에 연못을 팠음은 물론 강상죄인이 생긴 고을은 강등되고 수령은 파면되었던 것이다.

지평은 1688년(숙종14)에 다시 현으로 설치되었으니 4년 만에 복구된 것이다. 복구된 지평현은 1895년(고종32) 지방관제 개정에 의해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를 시행하면서 양근군과 함께 춘천부(春川府), 지평군(地平郡)으로 관할부가 바뀌고 읍호도 군(郡)으로 바뀌었다. 이때 지평군은 군내(郡內)·상동(上東)·하동(下東)·남면(南面)·상서(上西)·하서(下西)·상북(上北)·하북(下北) 등 8개 면을 관할하였다.

지평의 관할 면(面)에 관한 기록은 조선 현종대인 1650년대 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 처음 나타나는데 각 면의 명칭은 없이 장 오면(掌 五面)이라고만 적혀있다. 그 후 100여년이 지나 편찬된 『해동지도(海東地圖)』 지평현편 여백에 남면(南面)·상서(上西)·하서(下西)·북면(北面)·상동(上東)·하동(下東) 등 6개면이 적혀있었다.

경기도 지평군으로 된 것은 춘천부에 속하게 되었던 다음해인 1896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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