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누비기 Ⅱ-영춘 이복재 경기도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또한, 장씨를 요물이라고까지 불렀던 것은 아무래도 자신의 마지막 후원세력이던 장씨의 유배에서 온 인간적인 회의와 좌절감과 여기에 관련된 도당의 인물들[耆年(기년)·碩德(석덕)]에 대한 반감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이형우, 『고려 우왕대의 정치적 추이와 정치세력연구』, 고려대박사학위논문, 1999, 119 ~124쪽)

그러나 장씨에 대한 치죄는 그의 고향인 지평으로의 유배로 끝나지 않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 다음과 같은 소를 올려 처형을 강력히 요청하였던 것이다.

“장씨는 본래 시비(侍婢)인데도 유모를 참칭하면서 외람되게 은총을 구했습니다. 일찍이 지윤(池奫)과 내통해 반란 음모를 꾸몄으며 양백연(楊佰淵)·홍중선(洪仲宣)·김도(金濤) 등과 서로 내응하다가 그 행적이 드러나는 바람에 다른 사람은 모두 처형을 당했으나 장씨만은 요행히 죽음을 면했습니다. 그런데도 다시 심복인 원순(元順)을 허완(許完)과 윤방안(尹邦晏)에게 보내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허완 등은 벌써 사형을 당했으나 장씨만은 외지로 유배되었습니다. 정보에 따르면 이의와 유보(兪甫)가 한 패가 되어 장씨를 개경(開京)으로 귀환시키려 한다니 부디 장씨를 처형해 아예 화근을 끊어버리소서.”

어려서부터 젖을 먹여 자식처럼 길러 어머니로 여겼던 우가 1374년 10살 때 왕이 되었고, 자신이 믿는 가장 튼튼한 후원자로 여겨 재상에 버금가는 대우로 인간적인 은덕을 갚으며 목숨만이라도 어떻게든 살리려했지만 피비린내 나는 권력다툼으로 인해 우왕은 즉위한 지 6년 만에 유모 장씨를 처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장씨는 1380년(우왕 6) 1월 참형에 처한 후에 그 머리를 개경(開京)으로 보냈다(『고려사』 권제134, 열전 권제47, 禑王 6年, 1월). 1379년(우왕 5) 12월에 고향인 지평에 유배된 지 불과 한 두 달만의 일이었으니 우왕의 유모가 된 지 15~16년, 우가 즉위한 지 6년 만에 우왕의 유모 장금장은 영욕(榮辱)의 생을 고향에서 처형당함으로 마감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가 누군지 나이는 몇인지조차 알 길이 없다. 다만 처형된 머리는 개경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나머지 시신으로 장사지냈을 테고 그 ‘무덤이 용문면 연수리 보리사터 뒷산에 약 300년 전까지 있었으나 지금은 볼 수 없다’고 1991년 간행된 양평군지 1180쪽에 적혀있을 뿐이다. 이러한 고려 우왕의 유모 장씨에 대한 우왕의 배려로 폐현 460년 만인 1378년(우왕 4) 말에 현으로 승격시켜 감무를 두었다가 다음해인 1379년(우왕 5) 12월에 장씨를 지평으로 유배시키면서 다시 폐현시켰으리만큼 고려시대 당시 지평의 존재는 그리 크지 않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지평이 다시 현으로 승격된 것은 장씨 유배로 다시 폐현된 13년 후인 1391년(공양왕 3)의 일이다. 이유는 지평에 철장(鐵場)을 설치하면서이다. 즉 철장(鐵場)을 현 지경(地境)에 두고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어 겸임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철장이란 철의 생산지에 설치한 제련장(製鍊場)을 뜻한다. 고려시대부터 설치하였는데 조선시대에는 태종 7년(1407)에 비로소 철장(鐵場)을 설치하고 백성을 모집하여 철을 제련하여 국용(國用)에 쓰게 하였다. 고려시대 당시 철의 중요성은 매우 컸으므로 철장을 설치하면서 감무를 겸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철장은 지평면 옥현리 광양마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광양마을 안쪽 광양저수지 북쪽으로 난 임도를 따라 올라가면 찾을 수 있는데, 서낭골 골짜기에 형성된 계단식 경작지 중간부분에 위치한다. 해발 369m의 배미산 남쪽 산록의 사면부인데, 범위는 좁으나 철재가 수북이 쌓여있다. 이곳에서 채집된 철재는 덩어리가 굵직하고 노벽에서 떨어져 나온 것들과 피치(pitch) 상태로 뭉쳐있는 것 등이 관찰된다. 이곳이 두 곳 중 첫 번째 흔적이다.

두 번째 흔적은 광양마을 안쪽의 광양저수지 남쪽에 있는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비교적 넓은 경작지가 나온다. 이 도로는 망미리로 넘어가는 옛 길인데 고갯마루 못 미쳐서 길이 좁아지고 길 남쪽에 논이 형성되어있다. 길이 좁아지기 전 약간 넓은 평지에서 산 쪽으로 약 50m쯤 올라가면 소나무 숲 가운데 세 무더기의 철재가 쌓여있다. 이곳의 철재는 앞의 첫 번째 곳의 것보다 잘고 기포가 적다.

‘일반적으로 제철유적은 다량의 땔감을 필요로 하므로 도요지와 마찬가지로 물과 임산자원을 따라 하류에서 상류로 이동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정밀조사가 이루어지면 더 많은 유적이 확인될 것으로 보인다’며 양평군지에는 ‘옥현리 야철지(冶鐵地’”로 기록되어있다(『양평군지』,2005,중권 151~152쪽). 야철지란 철을 제련하던 곳을 이르는 말로 지평의 연혁에 나타나는 철장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앞의 야철지는 병기창이고 다른 곳은 조선시대 주전소였다는 말이 주민들에 의해 전해 내려오긴 하지만 각각 시대가 다른 야철지인지, 무엇을 생산하였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학술연구 등을 통해 역사적 가치를 조명하고 훼손과 멸실 염려도 있어 보존대책도 세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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