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누비기Ⅱ-영춘 이복재 경기도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지윤(池奫,?∼1377)은 장씨를 통해 권력을 얻었다. 지윤(池奫)은 충주(忠州) 사람이고, 그 모친은 무녀(巫女)였다. 군졸[行伍]에서 시작해 여러 차례의 종군을 해서 공을 세웠다. 공민왕(恭愍王)대에 거듭 승진하여 판숭경부사(判崇敬府事)가 되었는데 신돈이 처형당하자 지윤이 그의 옷가지와 패물을 모두 차지해버렸다. 우왕 때에 문하찬성사 판판도사사(門下贊成事 判版圖司事)에 제배되었다. 강을성(姜乙成)이란 자가 금을 판도사(版圖司)에 납품하고 미처 값을 받지 못하였는데, 죄를 짓고 처형당하였다. 지윤은 그 처를 취하여 첩으로 삼았고, 금값으로 포 1500필을 받았다. 재상 신순(辛順)이 처형되자 지윤은 아들 지익겸(池益謙)을 신순의 딸에게 장가들였고, 마침내 몰수된 신순의 집과 재산을 찾아내어 아들에게 주었다.

지윤이 이인임(李仁任)·임견미(林堅味)와 함께 권력을 잡고 탐학한 짓을 저지르면서 김속명(金續命)이 청렴하고 정직한 것을 꺼려하여, 서로 알력을 빚었다. 지윤은 우왕의 유모인 장씨(張氏)와 간통하였고, 그 처 역시 장씨와 친한 사이여서 궁중에 마음대로 드나들므로 김속명이 그것을 기롱하며 말하기를, “재상의 처가 이유 없이 궁중을 출입해도 되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지윤이 그 말을 듣고 깊이 원한을 품고 있다가, 1374년 우왕이 즉위하자, 반야는 밤중에 태후궁(太后宮)에 들어와 우왕이 자기의 아들이라 호소하다가 순위부(巡衛府)에 하옥되고, 이어 임진강에 던져져 죽은(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반야(般若) 사건이 일어나자 지윤이 간관을 사주하여 김속명을 탄핵해서 유배 보내게 하였다. 그 이야기가 김속명의 열전[傳]에 실려 있다.

지평(持平) 송제대(宋齊岱)가 지윤이 유모 장씨와 관계를 맺은 것을 탄핵하려 하자, 지윤의 문객인 집의(執義) 김승득(金承得)이 그것을 알렸고, 이에 지윤은 송제대를 지태안군사(知泰安郡事)로 폄출시켰다. 이후 지윤은 조정에서 권력을 휘두르면서 김승득 및 지신사(知申事) 김윤승(金允升)을 측근[羽翼]으로 삼았다. 지윤이 임박(林樸)을 죽일 때 이인임·경복흥은 모두 듣지 못하였고, 결국 지윤을 싫어하게 되었다.(고려사 권125, 열전 권38, 간신(姦臣), 지윤)

장씨에게 뇌물을 주고 불법청탁을 해 정적을 제거하거나 그와 음모를 꾸며 권력을 잡으려는 자들까지 생겨났던 것이다.

종부부령(宗簿副令) 이의(李義)를 장형에 처한 후 양광도(楊廣道) 내상(內廂)으로 유배 보내고, 찬성사상의(贊成事商議) 양백익(梁伯益)도 창녕(昌寧)으로 유배 보내는 일이 있었는데, 이의가 장씨와 함께 음모를 꾸민 사실을 양백익이 알고도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려사,세가,우왕 5년(1379) 기미년 12월)

정당문학(政堂文學) 허완(許完)과 동지밀직(同知密直) 윤방안(尹邦晏)이 자기 처들을 시켜서 장씨(張氏)에게 청탁해 내재추(內宰樞) 임견미(林堅味)와 도길부(都吉敷)를 참소해 제거하도록 하니 우왕이 임견미 등을 각자의 집으로 돌려보내고 궁궐 출입을 금지시킨 일도 있었다. (고려사,세가,우왕 5년(1379) 기미년 9월)

이에 임견미 등이 최영·경복흥(慶復興)·이인임(李仁任)에게 달려가, “허완 등이 우리 두 사람을 죽이고자 하니, 그 화가 공들께도 미칠 것입니다”라고 일러 바쳤다. 밤에 허완 등이 왕의 분부라고 속이고 최영을 두세 차례나 부르자, 최영은 화가 자신에게 미칠까 염려해 부하 군사들을 거느리고 경복흥·이인임 등과 함께 흥국사(興國寺)에 모였다. 무장한 군사들을 대거 도열시켜 놓은 채 양부(兩府)와 백관(百官) 및 기로(耆老:원로)들을 소집해 장씨(張氏)를 국문하라고 주청하게 했다.

우왕이 최영을 급히 불렀으나 최영은“지금 나라 전체가 실망하는 일이 생겼으니 주상께서 중의를 따르셔야만 제가 입궐해 뵈올 것입니다.”라고 거절했다. 우왕이 다시, “경이 병들어 여러 날 동안 조회에 나오지 않았으니 한번 만나보고자 하며, 또한 그 실망했다는 일이 무엇인지 물어보고자 하노라.”고 전했다. 이에 최영이 입궐하려고 했으나 재상들이, “간악한 도적이 궁궐 안에 있으니 함부로 들어가서는 아니됩니다. 공께서 가면 이 군사들이 필시 혼란에 빠질 것이며 그렇게 되면 나라 전체가 조용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저지하므로 최영이 이 의견을 따랐다.

양부(兩府)와 대간(臺諫)이 궁궐로 나아가 장씨를 하옥해 죄를 다스리라고 요청했으나 우왕이 받아들이지 않자, 최영 등은 장씨의 족당(族黨)인 강유권(康侑權)·원순(元順)·원보(元甫) 등을 수감하고 가두고 이들을 신문하였다. 노한 우왕은, “궁중의 일을 양부와 대간에서 알 턱이 없으니, 분명히 환시(宦寺)를 통해 새어나간 것이 틀림없다”고 하며, 내시 정난봉(鄭鸞鳳)을 하옥시키고 이득분(李得芬)·김실(金實)을 각자의 집으로 내쫓았다.

우왕이 최영에게 군대를 해산시킬 것을 명하면서, “경은 어떤 적을 막으려고 군사들을 거느리고 버티며 궁궐로 들어오지 않는가? 경은 일찍이 누대의 충신이라 자처했는데, 그 충성스러운 마음은 어디로 갔는가?”고 설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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