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누비기Ⅱ-영춘 이복재 경기도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지평(砥平)의 연혁은 삼국시대에는 『삼국사기』 권 35, 잡지4, 지리2, 신라의 삭주(朔州)에 기록되기 시작하여, 고려시대에는 『고려사』 권 56, 지권10, 지리1, 양광도, 광주목, 지평현에 연혁이 기록되어있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연혁이 기록되어 있다.

위에 열거한 몇 가지 기록들을 종합하여 정리하여 수록하였다고 평가할 만한 것으로 보이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지평현에 관한 건치연혁은 다음과 같다.

“본래 고구려의 지현현(砥峴縣)인데, 신라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삭주(朔州,지금의 춘천)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고려 현종(顯宗)이 광주(廣州)에 붙였고, 신우(辛禑)가 유모 장씨의 고향이므로 감무를 두었다가 뒤에 파하였으며, 공양왕 3년에 현의 경내에 철장(鐵場)을 두고 감무를 설치하여 겸하게 하였는데,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고치었다. 전조(前朝) 말에 여러 현의 감무를 모두 참외(叅外) 및 권무(權務)와 사(司)의 이전(吏典)으로 시켰기 때문에, 품질(品秩)이 낮고 사람이 미천하여 세상에서 천하게 여기었다. 홍무(洪武) 21년에 비로소 조관 육품(六品) 이상을 가려 제수하여 보내어 그 소임을 중하게 하였으나, 감무의 이름이 오히려 그대로 있더니, 이때에 와서 고치었다. 여러 도가 이와 같다.”

위 내용을 보충하면 신라에서 지평현으로 이름을 고친 왕는 경덕왕(景德王)이고, 고려 때에는 현종이 삭주의 3영현〔領縣,녹효현(綠驍縣)ㆍ횡천현(潢川縣)ㆍ지평현〕 중의 한 영현이었던 지평현을 없애고 1018년(현종 9)에 광주목에 내속(來屬)시켰으며, 1378년(우왕 4) 감무를 두었다가 얼마 뒤에 없앴고, 1391년(공양왕 3) 철장을 두고 감무를 설치하여 겸하게 하였다. 조선에 이르러 1413년(태종 13)에 비로소 현감으로 고쳤으니 이는 고려조인 1388년〔우왕 14, 홍무는 명(明)의 연호(年號)로 위화도회군이 있었던 해〕에 전국 여러 현에 감무를 두고 참외ㆍ권무ㆍ이전 등 모두 낮은 관직으로 임명하였던 것을 시정하여 현과 그 책임자의 위상을 높여주고자 예와 같이 복구시켰다는 것이다.

1018년(현종 9)에 광주에 속하게 하여 없어졌던 지평현을 360년 만에 다시 설치하고 감무를 두게 한 것은 신우〔고려 우왕〕 유모 장씨의 고향이었기 때문이었다. 유모 장씨에 관한 기록을 『고려사』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이를 종합해 정리해 보기로 한다 .

우왕은 고려의 32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1374~1388년이다. 1365년(공민왕 14) 태어나 아명은 모니노(牟尼奴)로 신돈의 시녀 반야(般若)의 소생으로 『고려사』에 적혀있다. 공민왕이 신돈의 집에 미행(微行)하여 낳은 아들이라 하여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복주(伏誅)된 후 궁중에 들어가 태후궁〔太后宮 : 명덕태후(明德太后)의 거소(居所)〕에 있다가 1373년 우(禑)라는 이름을 받고 강령 부원대군(江濘府院大君)에 봉해졌다. 뒤에 태후의 명에 의해 궁인(宮人) 한씨(韓氏) 소생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신돈의 아들인지 공민왕의 아들인지 이론이 분분하다. 이듬해 공민왕이 시해(弑害)되자 10살의 어린나이에 즉위했다.

장씨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김횡(金鋐)이 신돈에게 뇌물로 바친 노비였다. 장씨가 우왕의 유온〔乳媼,유모(乳母)와 같은 말로 이하 유모라 한다〕이 된 것은 신돈이 우왕을 자기 집에 데려다 장씨로 하여금 젖을 먹여 기르게 하면서 부터이다.

유모 장씨의 고향은 지평(砥平)으로 이름은 금장(金莊)이다. 우왕은 즉위한 후에 장씨를 각별하게 우대하였다. 세자나 대군이 아닌 자로 정국의 혼란으로 왕위에 오른 우는 자신을 왕위에 오르도록 뒷받침 해 준 사람들 가운데 유모를 측근중의 측근으로 여겨 자문에 응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왕3년 11월에는 장씨에게 다음과 같은 사은의 글을 보냈으며, 쌀과 콩을 합쳐 60석을 내려 주었다.

“옛일을 생각해 보면, 모후께서 불행하게도 홀연 별세하니 네가 유약한 나를 조심스레 보호하는 데 온갖 노고를 아끼지 않았으므로 오늘의 평안함을 맞게 했으므로 날마다 잊지 않을 것이다. 이에 토지 100결과 노비 10구를 하사하니, 비록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열 번에 이르지 않는다면 모두 다 용서할 것이다.”

1379년(우왕 4) 11월에는 광주(廣州)관할에 속해있는 지평이 그의 고향이라 하여 승격시켜 감무(監務)를 두게 하였고, 1378년(우왕 5년) 8월에는 장씨를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으로 삼고 인장을 제작하기도 한 것도 우왕의 장씨에 대한 감사와 보은의 표시였던 것이며, 장씨는 우왕이 생전에 어머니로 부를 정도로 각별한 애정을 쏟은 인물로 우왕 3년 11월에는 시중 경복흥과 이인임에게 토지와 노비를 내려 줄때에는 재상인 이들과 같은 양의 토지와 노비를 내려 주었던 점을 보더라도 장씨에 대한 우왕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우왕이 자주 왕비의 처소에 들르자 장씨가, “군왕은 반드시 날을 가리어 비빈(妃嬪)의 처소에 행차하시는 것이 예법이온데 지금 들개처럼 어슬렁거리셔서야 되겠습니까?”하고 입에 담기 어려운 말로 나무라기도 했다는 것도 당시 장씨의 위상을 보여준 일례이다.

저작권자 © 양평시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