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누비기 Ⅱ-영춘 이복재 경기도향통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양평이 배출한 인물 중 태고 보우는 거물중의 거물이다. 그가 12가지 대원을 세워 수행정진한 상원사, 한때 주석하며 후학들을 가르치고, 나중에는 머물며 140여 칸의 대사찰로 중창하였음은 물론 그의 석종탑〔사나사원증국사탑(舍那寺圓證國師塔),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2호〕과 석종비〔사나사원증국사석종비(舍那寺圓證國師石鐘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3호〕가 있는 사나사 등 그의 생애와 업적과 관련된 유적이 군내에 남아있어 양평의 큰 문화적 자산으로 지역의 정통성있는 문화콘텐츠로 활용할 충분한 가치를 지녔다.

사나사원증국사석종비의 비문은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배불숭유〔排佛崇儒,‘숭유억불(崇儒抑佛)’이라고도 한다〕정책을 편 삼봉 정도전이 지었음은 눈여겨 볼 대목이다. 태고 보우는 공민왕의 왕사로 있을 때 개경은 왕기가 다하여 복고정치를 펴기 어려우니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자고 건의했고, 이에 공민왕은 한양에 일부 궁궐을 짓기에 이르렀으나 일부 신하가 묘청의 예를 들어 반대함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정도전은 조선 초에 한양천도를 이루는 결정적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한양을 계획도시로 설계하고 실행한 인물이다. 또한 그는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을 정리하여 제시한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이라는 법전을 태조에게 지어 바쳤으며, 성종 때 『경국대전』이 편찬되는 모체가 되었다. 고려 말 태고보우의 한양천도의도가 조선 초에 이루어진 것이니 어찌 보면 보우가 제안하고 정도전이 실행에 옮긴 것이라 볼 수도 있다. 또한 두 사람은 비슷한 이상(理想)을 실천하려한 개혁주의자였음도 배불주의자인 정도전이 존경한 나머지 보우스님의 비문을 지은 이유인지도 모른다.

양근이 1356년(공민왕 5)에 보우의 고향이라 하여 양근군으로 승격시킴과 함께 보우가 미원장 소설암에 우거하므로 미원장을 미원현으로 승격시켰다가 그해 다시 땅이 좁고 인구가 적다고 하여 양근현에 소속시켰다. 태고가 왕사로 봉해진 해의 일이다. 보우는 1348년(48세)에 중국에서 귀국하여 중흥사에 머물다가 도를 더욱 깊이 하고자 미원의 소설산(小雪山)으로 들어가 4년 동안 농사를 지었던 적이 있으니 이것이 미원과의 인연이다. 잠시 우거하다가 개경으로 갔기 때문에 미원장의 현승격을 되돌려 놓은 것이다. 미원은 이후 양근 또는 지평에 속해 있다가 1895년 관제개혁에 의하여 양근군 설악면으로 개칭되고, 1942년 설악면은 가평군으로 편입되어 양근과 이어진 역사적 고리가 끊어졌다.

조선시대 양근의 연혁은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적혀있는데 『고려사』 지리지와 그 내용이 같다. 이후 양근의 연혁 변천내용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와 『대동지지(大東地志)』 등에 적혀 있다.

『증보문헌비고』는 조선후기 실학이 발흥했던 영조 때 처음 편찬돼 정조 때 수정보완한 후 고종 때 총 250권 50책으로 완성된 조선시대 문물을 집대성한 책으로 정치·경제·교육·천문·예술·풍속 등을 망라한 방대한 자료를 수록하여 조선시대 백과사전으로 부르기도 하는 한국학연구 분야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기본서이다. 이 책 16권, 여지고 4, 군현 연혁 2, 경기 조에는 고조선ㆍ백제, 고구려, 고려, 조선 등 시대별로 각 군현의 연혁을 표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양근의 연혁에 관하여는 『삼국사기』 지리지,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수록내용을 그대로 옮겼으나 『대동지지(大東地志)』의 수록내용까지 망라하여 추보하여 조선시대까지 양근을 비롯한 전국 여러 지역의 연혁 변화를 쉽게 알 수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양근은 1658년(효종 9) 지평에 편입되었다가 10년 후인 1668년(현종 9)에 군으로 복구되고, 1728년(영조 4)년에는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41년(영조 17) 다시 군으로 복구되어 1747년(영조 23) 고읍(지금의 옥천면)의 건지산(乾止山)에서 갈산(葛山)으로 치소(治所)를 옮기는 이읍(移邑)을 단행했다. 그 후 1776년(정조 1)에 또다시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85년(정조 9)에 군으로 복구하였다. 이처럼 양근은 17세기 이후 10년간의 지평편입과 세 차례의 읍호승강(邑號陞降)을 거듭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에 따라 1895년 5월 대대적인 지방행정구역의 개혁이 단행되었다. 이때 조선 초기 이래 시행하던 8도제를 폐지하고, 새로이 23부제(府制)를 공포하였다. 이와 함께 종래 부·대도호부·목·도호부·군·현 등으로 나누어져 있던 지방행정구역을 총 337개의 군으로 단일화하고, 이를 23부(府) 아래에 분속시켰다. 이때 양근은 춘천부(春川府)의 13개 군의 하나로 속하게 되었다.

양근의 면(面)은 『동국여지지』 양근군 건치연혁에 장십면(掌十面), 즉 10개 면을 관장하다는 내용이 처음 기록되기 시작하고 『해동지도』 양근군 지도여백에 동종면(東從),서시면(西始),서중면(西中),서종면(西從),남시면(南始),남중면(南中),남종면(南從) 등 7개 면이 기록되어 있다.

 

저작권자 © 양평시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