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인터뷰> ‘집 짓는 화가’ 김진화

설치미술로 해석한 예술가의 집은…
‘미술관이 된 집, 집이 된 미술관’

“지게 뚝딱 만들어내는 농부들 보면
이 분들이 진짜 예술가구나 싶어”

 

도시인들의 꿈이 화장실 두 개 딸린 아파트를 갖는 것이라면 시골 사는 이들의 바람은 작아도 내 땅에 내 집을 지어보는 게 아닐까 싶다. 6년 전 전원주택에 반해 이사 왔다. 외따로 두 집만 있었는데 우리 옆집은 딱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주택이었다. 주인이 화가가 지은 집이라고 했다. 살수록 뭔가 불편했던 우리 집과는 달리 옆집은 근사하면서도 시골살이에 맞게 설계되어 있었다. 집을 지은 사람이 몹시 궁금했다.
몇 년이 지난 후 그 집을 지은 이가 ‘집 짓는 화가’ 김진화씨(56)임을 알게 됐다. 그의 가족은 작가다. 아내 김승민 작가는 동양화가이고, 큰딸 김미기씨는 아빠와 같은 서양화가다. 독일에 유학하다 군 입대로 귀국한 아들 김균수씨도 미술전공을 준비 중이다. 김진화씨를 아직은 살짝 미완성인 양서면 용담리 그의 집에서 만나보았다.

 

김진화 작가는 자신이 지은 집이 어떤 설치 미술처럼 돋보이거나 특별하진 않아도 자연 속에서 잘 어우러지면 좋겠다고 했다. 자신이 좋아서 사는 지역의 집들은 그의 족적인 셈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의 작품이다.

- 양평에 오신 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20여년 전, 큰 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들어왔어요. 지방이 고향인 작가들을 보면 집단 속에서 길들여진 것과 다른 뭔가가 있더군요. 학교에 근무하면서 학원도 운영할 땐데도 주 2회는 야외로 돌아다녔어요. 그러고 다니는 게 힘들어서 시골로 가자, 어차피 가는 거 좋은 데로 가자 싶어 강원도 정선 화진부를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해남 분이라 서울서 시골로 가는 걸 반대하셨어요. 그때만 해도 거역을 못해서 타협한 곳이 남양주 수동이었어요. 이사를 앞두고 집을 방문하러 가는데 집이 팔렸다고 연락이 왔어요. 내친 김에 쭉 달려서 선배 작가가 있던 양평에 왔는데 마침 서종면 정배리에 나온 집이 있더군요. 1년만 살아보자 하고 들어왔다가 7∼8년을 살았어요. 이후 문호리 다릿골에서 근 10년 살다 최근 용담리에 집을 지어서 왔어요.”

- 이전에는 미술관련 일을 하셨지요?

“초등학교 2학년 때 한국일보 주최 미술대회에서 우연히 최우수상을 받게 되면서 쭉 그림에 관심을 가졌던 거 같아요. 학교 게시판에 늘 제 그림이 걸리는 게 일상이기도 했고요.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진로를 고민하는데 누나가 그림을 그리라고 조언을 하더군요. 배고픈 직업이라고 아버지가 만류하셨지만 배가 고파도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는 게 맞다 싶었어요. 그렇게 미술을 시작해서 대학원까지 마치고 중학교와 미술고교에서 10여년 정도 근무를 했어요. 이후 스테인드글라스 일도 한 5년 하고 장인어른이 하시던 특수목 가공 일도 2년 정도 도왔는데 사업이 여의치 않아 다 접고 양평으로 들어왔지요. 모든 걸 내려놓고 그림에 전념하자는 마음으로 들어와서 그림도 그리고 농사도 지으면서 꿈같은 생활을 했지요.”

- 우연히 건축일을 시작하셨다고요.

“독립된 작업실이 늘 갖고 싶었어요. 마침 누님이 사놓은 땅 옆에 땅을 구하게 되어 3000만원을 가지고 반이라도 짓자는 심정으로 집을 지었어요. IMF 때 있는 돈을 다 날렸거든요. 껍데기가 올라가니까 가족들이 안쓰러웠는지 조금씩 도와줘서 완성할 수 있었지요. 당시 양평예총에서 사무국장으로 일할 때라 정배리에서 문호리로 새벽 5시에 나가 집을 짓고 12시에 양평으로 출근하면서 1년 걸려 지었어요.”
(그래도 직접 집을 짓는다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작가는 이런저런 작업을 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목수나 다름없어요. 집을 지을 즈음 땅을 사서 집을 짓는 후배들이 많아서 정보 공유도 하고 품앗이도 했어요. 공부하면서 집을 지었지요. 정배리에서 박우장씨라고 좋은 이웃을 만나게 되어 많은 걸 배웠어요. 농사짓고 살면서 불편한 것들은 스스로 해결해야 하니 기본적인 난방, 식수, 배관구조들을 배웠어요. 시골사람들이 지게나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 내는 걸 보며 스스로 초라함도 느끼고, 이 분들이 진짜 예술가구나 하고 많이 감탄했습니다.”

김진화 작가는 20여 채의 집과 카페를 짓고 건축 일을 많이 배웠다고 해도 지게나 농사에 필요한 도구를 뚝딱 만들어내는 농부들을 보면 예술가는 바로 이 분들이구나 하고 감탄한다.

- 본격적으로 건축 일을 하게 된 계기는?

“우리 집을 짓고 나서 마을에 이사 오는 사람의 집을 의뢰받았어요. 손으로 기술 시간에 배운 걸 근거로 평면도, 정면도, 모형도들을 간단하게 만들어서 시작했지요. 돌아보면 그 당시에는 구체적인 마무리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디테일하지는 못했던 거 같아요. 집을 짓는 룰도 정확하게 몰랐고 감각적으로 필요한 공간들을 만들었어요. 그렇게 2006년에 시작한 일이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10여년이 되었네요. 그간 전원주택 15채, 카페는 5개 정도 지었어요.”
(의뢰인들은 주로 어떤 분들인가요?) 나이든 분들은 편하고 딱 떨어지는 아파트 같은 공간을 원하세요. 돈이 많으니 설계도 제대도 맡기고… 그러다보니 정해진 비용 안에서 특별한 집을 짓고자 하는 이들이 주로 찾아오세요. 처음에는 작업실을 짓는 사람들 위주로 오다가 지금은 집을 지을 분들이 소개소개로 오세요. 건축은 신뢰가 중요한 거 같아요. 요즘 온라인에서 허황된 게 많아 거기에 쓱 넘어가 힘들게 엮이는 경우도 많은데, 저는 신뢰관계에 있는 사람들, 지인들 위주로 했던 거 같아요.”

김진화 作 ‘산’
김진화 作 ‘from a tree’

- 예술가의 집은 어떤 게 다른지 궁금합니다.

“한 10년 전 유럽을 간 적이 있는데 건축물들이 인상적이었어요. 건축물이 자연적인 소재일 때 가장 아름답다 느꼈어요. 도시적인 반듯반듯한 것도 좋겠지만 노출될 건 노출되는 자연스러운, 또 환경적으로 좋은 집을 만들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집을 지을 때 가급적 바닥몰딩을 안 해요. 몰딩은 뭔가 잘 안 맞을 때 치게 되는데, 그런 부분을 군더더기 없이 하려고 애쓰죠. 너무 딱 떨어지는 건 무미건조할 수도 있어 어떤 때는 손맛이 나는, 요즘 유행하는 빈티지한 느낌을 섞기도 하고요. 집이란 게 살다보면 자꾸 복잡해져서 될 수 있는 한 단조롭게 포인트만 정확하게 해줍니다. 설계할 때 ‘여기는 내가 사는 집이다, 내가 쓰는 집이다’ 생각하고 내 몸이 그 공간에서 계속 돌아다녀보면서 제일 합리적이고 편한 공간을 내내 생각하죠. 그래서인지 설계가 끝나고 나면 굉장히 익숙한 공간이 됩니다. 집을 3채 정도 짓자 제가 지은 집이 자연에 덩치 있는 뭔가를 던져놓는, 그래서 자연을 망쳐놓는 건 아닐까 우려가 되더군요. 어떤 설치 미술처럼 돋보이거나 특별하진 않아도 자연 속에서 잘 어우러지면 좋겠다는 싶더라고요. 제가 좋아서 사는 지역의 집들이라 나의 족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제 작품이잖아요.”

- 가족이 전부 작가인데 전업작가가 부럽진 않으세요?

“사실 안정적인 직업이 있는 아내가 뒷받침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 사람이 실은 빨리 성장하기도 하고요. 그런 걸 보면 부럽죠. 사실 우리 세대에선 붓을 드느냐 꺾느냐 이원론이 강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그림을 그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집을 짓든 다른 걸 하던지 작업의 형태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집을 짓는 게 경제활동을 위해서기도 하고 예술이라고 하기엔 모호하지만 문화적인 부분으로는 지평을 넓혀보자 한 것도 있어요.”

김진화 작가가 양서면 용담리 집 주방에서 전업화가인 아내 김승민씨, 큰딸 미기씨와 함께 화목한 한 때를 보내고 있다.

(옆에서 아내 김승민 작가가 한마디 하신다) “남편이 생업 때문에 건축 일을 한다고 그러지만 사실 제가 볼 때 남편은 틀을 깨는 사람이에요. 그림을 그릴 때도 그랬고요. 작가들이 어떤 분야에 전문화되고 고착화되는 부분이 있는데, 남편은 뭔가 익숙해지는 걸 싫어하거든요. 집짓기가 남편에게 어쩌면 잘 맞기 때문에 한 거라고 생각해요.”

- 겨울은 비수기죠? 어떻게 사시는지요?

“봄철에 시작할 일이 있으면 준비하기도 하고, 1년 동안 부지런히 움직인 몸을 쉬게도 하고… 사실 저는 딱히 영업을 하지 않아서 언제 어떻게 바쁠지 또 언제 일이 없을지 몰라요. 하지만 정배리에서 아무것도 없었지만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처럼 충만했던 경험이 있어서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잘 살고 있습니다.”

- 앞으로도 작업은 계속 예정인가요?

“지금까지 의무방어전 식으로 쭉 했는데 이 집을 제대로 정리하게 되면 좀 더 적극적으로 작업해볼 생각입니다.”

 

양평이 고향이 된 것 같단다. 아이들에게도 자신에게도. 자연의 일부가 된 듯한 기분이 든다고 한다. 몸으로 사는 일을 하면서 자연과 소통하게 됐다고 한다. 봄이 되면 새싹이 땅을 뚫고 나오듯 겨우내 느슨해진 몸을 봄이 되면 다시 만들어가야 한다고.
작가지만 조금은 다른 일을 하고 살아가는 이의 비애(?)를 살짝 예상했으나 김진화씨는 이미 조금 다른 길을 걷는 작가로서 사실 나름의 행복을 찾았구나 싶었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백수가 되는 한 길 예술인들에게 조금은 다른 길이 있다고, 어쩌면 우리의 다양한 삶의 면면 모두가 예술이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멀게만 느껴졌던 예술이 좀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든다.
올해는 더 많은 그림 같은 집, 집 같은 그림이 그의 손에서 탄생하길 기대해본다. 그리고 희망 없는 시대에 그가 걸어간 조금 다른 길이 누군가에게 희망의 길이 되기를 바란다. 

이경희 객원기자는 소싯적 의상디자이너, 출판기획편집자, NGO 홍보팀장으로 일했다. 경남 산청 시골 출신이라 서울서 늘 흙을 그리워했다. 5년 전 양평으로 이사해 놀멍쉴멍 글도 쓰고 책도 만들며 남편과 두 딸 아이와 지지고 볶으며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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