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누비기Ⅱ-영춘 이복재 경기도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김자정은) 이듬해에 세자 왕심(王諶 :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시종하였으며, 충렬왕 7년(1281) 12월에 원나라에 신년 하례사(賀禮使)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같은 왕 3년 12월에는 탐라(耽羅 : 지금의 제주도)로 출사(出仕)하고 같은 왕 11년에는 동경부사(東京副使)로 임명되었는데, 내료로 지방에 출사한 것은 김자정에게서 비롯되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몇 가지 용어에 대해 설명하기로 한다. 내향(內鄕)이란 ‘왕비(王妃)의 친정(親庭)이 있는 곳’을 말하기도 하고(네이버 한자사전), ‘나의 아버지의 고향’을 뜻한다고도 한다. 반대로 외향(外鄕)은 어머니의 고향이란 뜻이라 한다.(한국 고전용어사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결국 양근은 김자정 아버지의 고향일수도 있고, 아버지가 계속 양근에 살면서 그를 낳았다면 김자정의 고향일 수도 있다. 감무를 두었던 양근현을 1269년(고려 원종 10)에 익화(益和)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고치고 현령으로 승격한 것은 김자정의 내향(內鄕)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는데, 『고려사』 권 104, 열전 17, 김주정전(金周鼎傳,국문 판)에 ‘대장군 김자정(金子廷)’의 주석(註釋)〔15〕가 ‘양근출신’이라 했으므로 여기서는 김자정의 고향으로 보아야한다. 가노출신으로 고려의 내료를 거쳐 가노가 지방관으로 출사하는 예를 만든 데 이어 고위직에 올라 고향의 읍호(邑號)까지 승격시킨 입지전적(立志傳的)인 인물임에도 정작 그의 고향 양평에서는 그에 대한 연구조차 없는 등 소홀히 다뤄 왔었던 것이다.

또한 양근은 1356년〔공민왕(恭愍王) 5〕에 왕사(王師) 보우(普愚,1301~1382)의 어머니 고향[母鄕]이라 하여, 양근현에서 승격시켜 양근군(楊根郡)이 되었고, 보우가 미원장(迷元莊)의 소설암(小雪庵)에 우거(寓居)하므로, 미원장을 현(縣)으로 승격시키고,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얼마 후 땅이 좁고 인구가 적다고 하여 다시 양근현에 소속시켰다는 연혁에 대하여는 원문 해석상 큰 오류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원문은 “以王師普愚母鄕(이왕사보우모향)”으로써 이 문구를 ‘왕사 보우의 어머니 고향이라 하여’로 의역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국어사전은 모향(母鄕)을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으로 고향(故鄕)과 같은 말이라 풀이하고 있음을 간과한 것이다.

원증국사(圓證國師) 태고(太古) 보우는 공민왕의 왕사이던 당시 불교계가 사분오열 되어 백인백색의 어지러움을 개탄하여, 구산선문(九山禪門)을 통합하고, 선교(禪敎)의 일치를 주장하는 등 불교개혁에 힘썼고, 원융불교사상(圓融佛敎思想)을 실천하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한국불교를 특징짓는 통불교(通佛敎)의 정신을 이어오게 하였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양대 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과 태고종의 조종(祖宗)으로 추앙받고 있는 큰 인물이다.

태고 보우는 양근에서 태어나 1313년 그의 나이 13세 때 회암사 광지선사에게 출가할 때까지 양근에서 살았다. 1330년(30세) 봄에 용문산 상원암에서 12가지 대원(大願)을 세우고 수행정진하였으며, 1338년(38세)에는 사나사에서 머무르며 후학을 지도하였는데 이때 양근(楊根)의 초당에서 어버이를 봉양하며 1,700측공안(則公案)을 점검하였다고도 한다. 1348년(48세)에는 도를 더욱 깊이 하고자 미원(迷原)의 소설산(小雪山)으로 들어가 4년 동안 농사를 지으면서 보임(保任)하며 산중자락가(山中自樂歌)를 지었다. 1367년(67세)는 사나사에 주석(柱石)하며 사나사를 140여 칸으로 중창하였고, 1369년(69세) 3월 공민왕이 전날의 잘못을 후회하고 혜기를 보내 청하므로 소설산으로 돌아왔고, 1382년(82세) 12월 14일 소설산에서 입적(入寂)하였다. 당시 미원은 양근에 속한 장(莊)이었으니 양근에서 출생하여 양근에서 입적한 양근인이었던 것이다.

원증국사 태고 보우는 “1301년 9월 21일 양근군 대원리(大院里, 지금의 양평군 옥천면)에서 출생하였으니, 성은 홍(洪)씨, 본명은 보허(步虛)이며, 시호는 원증이요, 아버지는 홍연(洪延), 어머니는 정(鄭)씨”라고 태고 보우 행장(行狀)에 분명히 적혀있어 양근출신임을 확실히 해 주고 있다.

그러함에도 일부에서는 태고 보우의 출신지가 홍주(洪州,지금의 홍성)라고 잘못 쓰고 있다. 『고려사』 권56, 지권10, 지리1 의 양광도 홍주의 연혁에는 “恭愍王五年, 以王師普愚內鄕, 陞爲牧(공민왕 5년,이왕사보우내향,승위목)”, 즉 ‘(홍주군을) 공민왕 5년(1356)에 왕사 보우의 내향이라 하여, 승격시켜 목(牧)이 되었다.’고 적혀 있어 충남 홍성에서는 지금까지도 태고 보우가 자기고장 출신으로 알고 있고, 많은 문헌과 연구논문도 이를 인용하고 있다. 이는 그의 본향(本鄕), 즉 관향이 홍주였거나 아버지의 고향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인하여 태고 보우의 출생지는 양근과 홍주 등 두 곳이라는 있을 수 없는 혼선이 있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내향을 본뜻대로 해석하고 실제로 그곳에서 태어났는지를 확인하였다면 없었을 혼선이다. 지금이라도 보우의 출신지를 홍주로 잘못 적고 있는 문헌 등을 바로잡는 일을 서둘러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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