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누비기Ⅱ-영춘 이복재 경기도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양평군(楊平郡)은 1908년 9월 당시 양근군(楊根郡)과 지평군(砥平郡)을 합병하여 양평군이라고 칭하게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양평군의 연혁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양근군과 지평군의 연혁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양근현(楊根縣)은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양근군〔楊根郡, 항양(恒陽)이라고도 한다.〕으로,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빈양(濱陽)으로 고치고, 소천군(泝川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高麗) 초에 옛 이름으로 복구하였다. 현종(顯宗) 9년(1018)에 〈광주목에〉 내속(來屬)하였다. 명종(明宗) 5년(1175)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고종(高宗) 44년(1257)에 영화(永化)라고 불렀다. 원종(元宗) 10년(1269)에 위사공신(衛社功臣) 김자정(金自廷)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승격시켜 익화현령(益和縣令)이 되었다. 공민왕(恭愍王) 5년(1356)에 왕사(王師) 보우(普愚)의 어머니 고향[母鄕]이라 하여, 승격시켜 양근군(楊根郡)이 되었다. 용문산(龍門山)이 있다. 용진도(龍津渡)가 있다. 공민왕 5년(1356)에 보우가 미원장(迷元莊)의 소설암(小雪庵)에 우거(寓居)하므로, 미원장을 현(縣)으로 승격시키고, 감무(監務)를 두었다. 얼마 후 땅이 좁고 인구가 적다고 하여, 다시 양근현에 소속시켰다.”

『고려사』 권 56, 지권(志卷) 10, 지리(地理)1 에 실려 있는 양광도(楊廣道)의 광주목(廣州牧)에 속했던 양근현의 연혁(沿革)이다. 앞부분의 양근현은 고구려 때의 양근군 또는 함양으로 신라 경덕왕 때 빈양으로 고쳐 소천군의 영현이 되었다는 내용은 『삼국사기』 권 35, 잡지(雜志) 4 지리 2에 실려 양근군에 대한 문헌상 최초의 기록으로, 여기에 이어서 『고려사』 지리지에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제35대 왕인 경덕왕은 757년(경덕왕16)에 주·군·현의 명칭과 행정체계를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이는 삼국통일 이전 옛 고구려와 백제·가야 시대의 명칭이 뒤섞여 사용되고 있던 지명(地名)을 정비해 지방통치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앙정부의 지방통제력을 높이기 위한 목적에서 시행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양근은 이름을 빈양이라 고치고, 소천군(泝川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소천군은 기천군(沂川郡;지금의 금사면 이포)이라고도 하였는데 지금의 여주(驪州)로 당시에는 황려현(黃驪縣;지금의 여주)과 함께 빈양현 등 2개현을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양근현에 대한 삼국사기 기록은 더 있다. 789년〔원성왕(元聖王) 5〕 9월에 “以子玉爲楊根縣小守(자옥을 양근현 소수로 삼았다)(이하 생략)”는 내용이 『삼국사기』 권 10, 신라본기(新羅本紀) 10 원성왕 조에 적혀있다. 소수(小守)는 현령과 비슷한 현의 우두머리로 제수(制守)라고도 하였는데 현의 장관이었다. 그리고 이 기사는 소수에 임명될 수 있는 자는 원칙적으로 문적출신(文籍出身, 국학 출신)이어야 함을 보여 주는 흔치 않은 기록이다.

중앙집권적인 정치 체제를 마련하고 국가 기반을 확립하기 위하여 983년(성종2) 고려는 전국에 12목을 설치해 처음으로 지방관을 파견하였고, 995년(성종14) 에는 당나라의 제도를 채용하여 10도(十道)를 설치하였다가 현종 때에는 5도양계(五道兩界) 체계가 사용되어 지방관제의 정비를 일단락 지었다. 이때 양근은 광주목에 속한 현이 되었다.

양근현을 거사참(去斯斬)이라 불렀던 기록도 있다. 『삼국사기』 권 37, 잡지(雜志) 6, 지리 4, 고구려 조의 한산주의 주·군·현·성에 “양근현을 거사참 이라고도 한다”라고 적혀있다. 한산주는 신라가 쓰던 지명이니 이 기록으로 보아 고구려 때에 이미 쓰인 지명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거(去)는 ‘가다’라는 뜻도 있지만 ‘떠나다’, ‘잃다’, ‘배반하다’는 뜻이 있고, 사(斯)는 ‘이’, 사물을 가리키는 대명사, 어조사 등으로 쓰이며, 참(斬)은 ‘베다’, ‘끊다’라는 뜻이니 배반자를 참수 하던 곳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더 깊이 연구하여야할 과제이긴 하지만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당나라군이 반항하던 고구려 군을 잡아 처형하던 곳이어서 이렇게 불렀을 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명종(明宗) 5년(1175)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다고 했다. 감무란 중앙에서 정식으로 관리를 설치하지 못했던 속군현과 향(鄕) ·소(所) ·부곡(部曲) ·장(莊) ·처(處) 등에 파견하였던 관직이다. 1018년(현종 9)에 광주목에 내속된지 157년 만의 일이었다.

현으로 승격하여 익화현령(益和縣令)이 되어 현령을 두게 되었으니 1269년(원종10)으로 위사공신 김자정의 내향(內鄕)이었기 때문이었는데 감무를 둔지 94년째 되던 해의 일이다.

김자정(金自廷 또는 金子貞·金自貞, ?~?)은 가노(家奴)출신으로 원종~충렬왕 때 내관낭장(內官郞將)·친종장군(親從將軍)·대장군을 거쳐 상장군 등 고위직을 역임하였다. 원종 9년(1268)에는 동생 김자후(金子厚) 및 임연(林衍) 등과 함께 김준(金俊 ; 최의를 살해해 최씨의 무단정치를 타도하고 왕권을 회복시키는 공을 세웠으나 그의 외교정책이 원종의 미움을 받자 임연 일파에게 살해)을 제거하는 정변에 참여하여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되었다.

<제223호(2016.12.15) 본란 중 ‘기천(祈川, 여주 천령현)군’의 ‘祈川’은 ‘沂川’의 잘못이므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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