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누비기 Ⅱ-영춘 이복재 경기도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배잔마을 아래에는 1962년 축조된 넓이가 10㏊에 이르는 대평저수지가 있다. 이 저수지를 끼고 341번지방도인 대평로가 절운고개와 연결된다. 대평저수지를 끼고 도는 대평로변 50여m에는 두 가지 눈여겨 볼 곳이 있다.

한 곳은 도로변 산기슭에 있는 대평리 고분 2기다. 양평 대평리고분군이라 하는데 대평리에서 망미리로 향하는 대평저수지 도로변의 독립가옥(양평군 지평면 대평로 151)으로부터 약 50m 지점의 도로와 지평면 대평리 산23-1번지 산기슭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2015년 10월28일 고분1호분에 이어 2호분의 발굴을 완료한 문화재청이 (사)한국매장문화재협회와 함께 양평 대평리 고분에 대한 최종 발굴조사 성과를 발표했다. 약 7세기 전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고분군은 축조방식이 신라의 금관총 등과 비슷해 고대의 고분 문화와 이곳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역사를 유추할 수 있는 귀중한 유적이라는 것이다. 이 고분이 축조된 것으로 보이는 7세기 전후의 우리나라 한강유역의 역사를 간추려보면 더 의미 있는 가설이 도출될지도 모르니 짧게 정리해 본다.

신라 제24대 진흥왕은 551년 백제 성왕과 힘을 합해 고구려를 정벌하여 한강 상류 10군을 점령한데 이어 2년 뒤인 553년에는 백제군이 점령하고 있던 한강 하류 지역마저 점령함으로써 한강 유역전부를 독차지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서해를 통해 중국과의 외교력을 키우게 되었고, 이에 그치지 않고 동해안을 따라 북상해 556년에는 안변까지, 그 후 2~3년 이내에는 함흥까지 진출하였다. 이렇듯 신라는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던 것이다. 이후 676년 신라는 마침내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고야 말았다.

삼국통일로 영토를 더욱 크게 확장한 신라는 확장된 영토의 중심이 되는 한강유역에 고위급관리를 파견하여 통치했을 것이다. 마을 분들의 증언과 발굴조사결과 발표에 따르면 이 고분은 여러 차례 도굴된 것으로 보여 특별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2호 고분의 규모와 구조, 그리고 미약하지만 발굴 작업 때 출토된 유물 등으로 보아 이 고분은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에 축조된 것으로 중부지역 최고 수준의 신라시대 굴식돌방무덤으로 평가된다고 한다.

예로부터 이 1·2호분이 있는 인근지역에는 모두 3개의 고분이 있었다고 알려져 왔으나 나머지 한 분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고분군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망미리에는 양평 망미리고분군1·2 등 2개의 고분군이 더 있다. 하나는 망미리 저른 마을의 북편 산지에, 또 하나는 저른 마을에서 대평리로 넘어가는 도로를 따라가면 나오는 고개 서편 매봉산의 북동능선 끝자락에 위치하는데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특히 망미리 고분군2는 고려 때 이곳이 고려장터였기 때문에 이 고려장터가 속한 산 이름을 고려산이라 했다가 고래산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이렇게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고분이 산재하는 이유는 혹시 이곳이 신라가 6세기 이후에 새로 확장한데 이어 삼국을 통일한 이후 영토의 중심으로 경주에서 파견한 고위급관리가 이 지역의 통치를 위해 자리 잡고 있던 곳이었기 때문은 아닐까하는 추측도 해볼 만하다.

실제로 이곳은 남한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로 동쪽으로는 망미산(일명 배미산), 고래산 등 비교적 높은 산이 병풍을 두른 듯 뒤를 받치고 서쪽으로 곡수천이 남한강으로 흘러가는 유역주변에 비교적 넓은 지역에 걸쳐 평야를 이루는 배산임수형 지형인데다 확장된 영토의 중간지점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시기에 양평은 양근과 지평으로 나뉘어져 있을 시기였고, 양근은 고구려 때 양근 또는 항양(恒陽)군이라 했고, 삼국통일 이후인 신라 제35대 경덕왕이 빈양(賓陽)으로 고쳐서 기천(祈川, 여주 천령현)군의 딸린 현(縣)이 되었다가, 고려 초에 복구되었다. 지평은 본래 고구려의 지현현(砥峴縣)인데, 신라 제35대 경덕왕이 지평으로 고쳐서 삭주(朔州, 춘천)의 딸린 현이 되고, 고려 제8대 현종 9년(1018)에 광주(廣州)에 붙였다가, 제32대 우왕 4년(1378)에 유모 장(張)씨의 고향이라 하여 감무(監務)를 두는 등 변천해 온 기록이 있을 뿐 그밖에 신라 제2의 통치중심지였다는 기록은 없다. 경주에서 파견한 고위관리가 아니라 이 지방 유력한 호족이 이 고분들의 주인공일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가능한 이유이긴 하나 이런 기록조차 없다.

분명한 것은 대평리 고분군은 중부지역에서 발견된 최대 규모의 신라시대 고분군으로 적어도 이 시대에 수도인 경주를 제외하고 신라 최고위급에 속한 사람들의 무덤을 이곳에 축조했다는 것은 아직까지 밝혀내지 못한 특별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 무덤이 조성된 이후 10세기가 지난 16세기에 이르러 바로 같은 지역에서 또 다른 사건이 있었던 점은 매우 유의미하다. 1592년(선조 25)에 발발한 임진왜란이 그것이다.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가 인솔한 일본군 제1번대 병력 1만8700명은 1592년 4월14일에 병선 700여 척에 나누어 타고 오전 8시 오우라항(大浦項)을 떠나 오후 5시에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여 그날로 부산포에 침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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