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누비기 Ⅱ-영춘 이복재 경기도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이때 마침 김백선을 찾아온 이가 있었으니 상동 목곡(上東 牧谷, 지금의 양동면 석곡리 목곡마을)에 대를 이어 살다 곡수(曲水, 지금의 지평면 곡수리로 당시는 여주에 속한 지역이었음)에 우거(寓居)하고 있던 선비인 괴은 이춘영(槐隱 李春永)이었다. 그 역시 국수보복(國讐報復)을 위해 의병을 일으킬 결심으로 평소 친교가 두터운 이웃마을의 안승우를 찾아갔으나 그가 제천장담에 가 있어 만나지 못하고 대신 그의 부친 안종응이 김백선에 관한 근황을 알려주며 찾아가 함께 의논해 창의하라는 권유를 받았던 것이다.

의기가 투합한 두 사람은 의거날짜를 정하고, 모병은 김백선이 맡고 군량과 무기 등은 이춘영이 맡는 등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본격적인 창의활동에 들어갔다. 전투력을 갖춘 포수들이야 휘하에 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설득하면 따를 것이지만 창의제의를 거절한 현감 맹영재의 방해는 피해야만 하는 부담도 있었겠지만 더욱 화급한 일은 중대사를 믿고 의지하며 함께 포수들을 이끌만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었다. 김백선이 맨 처음 찾은 사람이 바로 강릉김씨 양평입향조 김인성의 5대종손인 김진덕(金振德·1859~1931)이었다.

김백선이 살던 청운면 갈운리 하갈마을과 김촌은 몰은고개 하나 사이로 결코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나이 10살 차이인 둘은 자주 만나 간담상조(肝膽相照)하여 결의형제(結義兄弟)를 맺어 형우제공(兄友弟恭)하는 사이였다. 비록 길지 않은 기간의 우거(寓居)였지만 김촌의 김진덕과 울타리를 같이 쓰며 이웃하여 살았을 만큼 가까웠다.

김진덕의 자는 사준(士俊), 호는 석우(石隅)로 아버지 홍경(弘卿)의 다섯 아들 중 장남이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기개가 있어 동내 또래사이에서는 늘 대장이었으며 성장해서도 기골(氣骨)이 장대하여 구척장신에 힘이 세어 장정 6∼7명은 능히 제압하였음은 물론 얼마나 민첩했는지 축지법을 하는 것으로 소문날 정도였다. 장수체질로 통솔력이 있고 성품이 강직하고 위풍(威風)이 당당하고 비범(非凡)하여 한번 호령(號令)을 하면 산이 무너지는 듯 우렁차 호령대감(號令大監)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김백선으로부터 전후사정을 들은 김진덕은 친제 4명을 비롯해 종제 10여명을 모아놓고 “왜놈의 만행으로 국권이 침탈(侵奪)당하고 국모가 시해당하는 대변을 당하여 백선의형이 괴은 이춘영과 함께 창의하여 의병으로 출병하는데 나도 신민으로서 나라와 국권이 크게 농락당하는데 어떻게 가만히 앉아서 치욕을 받겠는가? 의(義)의 깃발아래 보국(報國) 애민의 뜻으로 동참하기로 했으니 형제들도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각오로 함께 출병하면 어떻겠는가?”라며 설득하니 참석한 형제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출병에 참여하겠다고 하였다.

나라에 충성만큼 효도 중요하니 가문의 보존과 가족 봉양(奉養)을 위한 최소한의 형제는 남기로 하고 종형제 중에서 실제 진현(振顯·1863~1917, 당시 33세)·진근(振根·1873~1947, 당시 23세), 유경 숙부의 아들 중 진승(振勝·1874~1933, 당시 22세), 재경 당숙의 아들 중 진문(振文·1865~1936, 당시 31세)·진영(振靈·1874~1932, 당시 21세), 응경 당숙의 아들 진기(振基·1871~1948, 당시 25세)·진순(振淳·1874~1922, 당시 21세) 등 실제 2명과 종제 5명 등 모두 8종형제가 의병에 출병하기로 하였다.

드디어 400여 의병이 1년 중 가장 춥다는 소한이 지나고 7일 후인 1895년(을미) 11월27일(음) 양동을 출발하여 강원도 원주 안창리 만수암에 도착 유숙하고 다음날 이춘영이 단에 올라 창의호국의 깃발을 높이 드니 우리나라 50년 독립운동의 불씨가 된 지평의병은 탄생하였다.

지평의진은 원주와 제천을 무혈입성하고 제천에서 이필희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진용을 정비하였다. 이때 김백선이 선봉장이 됨에 따라 김진덕은 그를 보필하는 좌장(左將)으로 활동하고 나머지 동생들은 선봉장 휘하(麾下)의 소부대에 편성되어 종군하였다. 지평의병은 한말 항일의병사상 처음으로 대승을 거둔 단양 장회협 전투에 참전하였고, 그 후 호좌의진에 편제되어 충주성 점령에도 악전고투하는 등 의형인 김백선을 보좌하고 뜻을 같이했다.

1896년(병신) 2월에 선봉장 김백선이 참형되자 이들 8종형제는 시신을 수습하고 군장등과 함께 고향 갈운리로 운구하고, 김진덕이 호상이 되어 정성을 다해 장사지낸 후 집으로 돌아왔으니 의병으로 출병한 지 3개월 만이었다.

한 가문의 8종형제가 의병에 참여한 것은 매우 특별한 경우로써 양평의 강릉김씨는 의(義)의 가문임에 틀림없다. 이 종형제들은 1907년(정미) 후기의병에도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금왕리가 의병의 소굴이라 하여 일본군이 마을 전체를 불 지르는 만행을 저지르는 등 여러 가지 정황이 이를 뒷받침한다. 양평을 의향(義鄕)이라 하는데 일익을 하였음은 물론 마을을 김촌이라 부르게 되었고 김진덕의 호인 석우는 마을의 공식지명으로 쓰였으며 지금까지도 쓰고 있으니 한 가문이 지역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주는 한 예이며 지역학에 있어 입향조를 비롯한 씨족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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