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누비기Ⅱ-영춘 이복재 경기도향토문화연구원 연구위원>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지는 추세이고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됨에 따라 인문학 중의 한 분야인 지역학(地域學)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지고 있다. 지역학이란 일정한 지역의 지리나 역사, 문화 따위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지역의 범위는 작은 마을부터 읍면동, 시군이나 국가, 나아가서는 오대양 육대주와 세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규정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지역학을 다루는 공간적 범위는 주로 기초자치단체부터 광역단체에 이르기까지 지방자치단체를 단위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다 보니 각 지방자치단체는 나름대로의 차별성과 상징성을 갖는 지리, 역사, 문화에 관한 콘텐츠를 개발하여 활용하고 있다. 지역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이다.

지역학 연구의 시작은 입향조(入鄕祖)부터여야 한다고 본다. 입향조란 단어자체로만 보면 그 마을에 처음 들어와 정착한 사람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사전적 의미는 마을에 처음으로 정착한 각 성씨의 조상을 말하는데 실제로도 이런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예의 농경문화사회에서 씨족은 지역의 여러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쳐왔다. 그러나 일제에 의한 식민통치와 한국전쟁을 겪고, 농경사회가 산업화를 거쳐 지식정보화 사회로 급격히 변화함에 따라 지역주민들의 이에 관한 공유인식이나 중요성, 관심도가 크게 약화되어 이렇게 가다가는 지역의 전통문화가 설 자리를 잃는 사태를 맞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지역학 연구의 첫 번째 접근방법은 각 마을이나 동성집단, 나아가 지역의 역사적 배경이 된 입향조로부터 그 성씨(姓氏)들이 살아온 가족사를 연구하는 것이다. 이 연구과정에서 지역의 역사문화와 연관된 사항들을 지역학으로 정리하는 일이 시급하다.

2년 전인 2014년 12월 양평군 평생학습센터에서 마련하고 양평군 종합사회복지관이 주관한 ‘지역역사문화강사 양성과정’ 수강생 58명이 중심이 되어 우리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결성된 학습동아리 ‘양평역사문화연구회’가 양평의 지역학을 다루기 시작하였음은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다.

양평역사문화연구회는 창립 1주년 기념사업으로 2015년 말에 연구보고서 형식의 소책자인 『양강문화산책』창간호를 발간했다. 순수민간조직으로 양평의 역사문화연구 및 강좌개최, 관내외 역사현장탐방, 연구발표책자발간 등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양평의 명가(名家)로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주도해온 성씨 중 우선 문화류씨, 평양조씨, 한양조씨를 선정, 기획 취재하여 『양강문화산책』창간호에 실은 점은 그 의도가 신선하다. 꾸준한 연구와 취재를 통하여 양평역사문화가 콘텐츠화하여 여러모로 유용하게 활용되고 지역학을 발전시키는데 기여하기를 기대한다.

입향 역사가 오래되고 지역역사문화를 주도한 명가라 부르기에는 미흡할지 모르나 입향 이후 지역의 역사문화정착에 기여한 가문도 많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손꼽을 정도로 적은 수의 명가가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주도했다면 그 정착과 확산에 숨은 역할을 한 씨족들의 역할도 매우 컸던 것이다. 양평 입향 역사가 그리 길지는 않지만 지역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주민들에게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는 긍정의 역사를 만드는데 기여한 가문을 찾아 연구하는 것이 뜻있는 일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강릉김씨의 시조는 김주원(金周元)으로 신라 태종무열왕의 6세손이며 명주군왕(溟洲郡王, 명주는 지금의 강릉)으로 봉해졌다. 문성공(文成公) 김인존(金仁存)이 27세손이고, 방조(傍祖)로 생육신(生六臣)의 한분이신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은 23세손이다.

강릉김씨의 양평 입향조는 32세손인 동은(東隱) 김인성(金仁成,1665~1695)으로 입향(入鄕)한 지는 330년 정도로 추정된다. 금왕리에 누대(累代)에 걸쳐 세거(世居)하여 번족함으로 강릉김씨 집성촌을 이루어 마을이름 또한 김촌(金村)이며 지금도 여러 가구가 모여 살고 있다. 김인성이 청운의 꿈을 가지고 상경하였으나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는 등 변란이 발생하고 조야에서는 분당으로 국사가 혼란함을 보고 관직에 대해 환멸을 느껴 평해로를 통해 낙향하던 길에 길지(吉地)로 여겨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

양평은 우리나라 50년 독립운동의 불씨가 된 을미의병의 발상지로써 을미의병 창의를 주도한 이춘영, 안승우, 김백선 의병장이 모두 양평출신이다. 1894년 갑오변란이 일어나고 다음해인 1895년에는 을미사변으로 국모가 일제에 의해 시해(弑害)당하며, 단발령이 시행되는 등 일제의 우리나라 침략야욕이 노골화하였다.

이에 격분한 청운면 출신의 지평고을 포군영수 김백선은 함께 동학군을 평정하여 현감이 된 지평현감 맹영재를 찾아가 거병할 것을 청하자, 화복을 들어 반대하므로 김백선은 관아 뜰에서 총을 부수어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 칼을 갈아두고 일본에 대한 보복과 자결까지 결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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