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식업 성공스토리> 능수엄마

52회 주방장 범도가 떠나다

 

“그땐 참 신났었지. 영업 끝나면 우리 둘이 술 마시러 다니고.”
나는 그 말만 던져주고 서둘러 휴게실을 나와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대승옥에서 배신당할 걸 뻔히 알면서도 말리지 못하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말을 진심으로 들어 줄 리가 없는 범도였다.

 

“나는 미스 강을 위하는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슈. 미스 강이 불행한 일을 당하면 목숨을 걸구래두 도와주고 싶었슈. 그런 내 맘을 몰라주는 미스 강이 원망스러워유.”
“미안해요. 범도씨가 착한 분이라 따뜻한 우정으로 지내고 싶었던 거에요. 나는 누구와도 연애 같은 건 생각해본 적 없어요. 우리 언니의 불행한 결혼을 본 후로 혼자 살기로 결심했어요. 사실 남자와 사귈 여유도 없어요. 사업가가 되는 게 내 꿈이라고 말했잖아요. 일을 배우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 없어요. 암튼 범도씨에게 오해를 사게 한 점 죄송해요.”
“우리 사이에 죄송이 뭔 소용이래유.”
“범도씨 자꾸 우리 우리 하시는데, 듣기가 좀 거북해요.”
“그럼 대승옥에 가는 건 어떻게 해유?”
“대승옥에 가는 거라뇨?”
“함께 글루 가자고 말했잖어유?”
“일방적으로 말해놓고 함께 가다뇨? 대승옥엔 가기도 싫거니와 간다 해도 내 마음이 끌릴 때 갈 거에요. 그런데 왜 자꾸 동행을 강요하는 거죠? 내내 얘기했지만 나는 누구에게 얽매이는 것 정말 싫어요.”
잠시 침묵이 흐른다. 그 침묵을 미스 강이 깬다.
“나는 춘천옥에도 오래 있지 않을 거에요.”
오래 있지 않을 거라니, 나는 미스 강의 말이 거슬렸지만 범도를 떼어놓기 위해 둘러댄 말이겠지 하고 걱정을 지워버렸다.
“그럼 워디로 갈건디유?”
“그거야 모르죠.”
“술 좀 드세유.”
“난 피곤해서 그만 들어가 자야겠어요.”
“오늘밤 둘이서 재밌게 지낼 참였는데…”
“이렇게 둘이 보냈잖아요?”
미스 강이 웃으며 일어난다. 나는 그들을 피해 서둘러 술집으로 걸어갔다. 우연히 미스 강의 마음을 확인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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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업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은 미스 강이 퇴근을 미루고 휴게실로 나를 찾아왔다.
“주방장 얘길 들으셨어요?”
“무슨 얘길?
“춘천옥을 그만두고 대승옥으로 간댔어요.”
“직접 주방장한테 들었어?”
“첨엔 저보고 같이 가자고 졸랐지만 거절했어요. 당치도 않은 소리죠.”
“봉급을 더 준다고 꼬셨을 텐데?”
“봉급이 문제가 아니죠. 아무리 돈 벌러 나온 일이지만 경우가 있잖아요.”
“고마운 말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보수가 우선이지. 보수가 많으면 유혹을 거절하기가 힘들어. 능수엄마에게 내가 얼마나 잘해줬어. 그래도 보수를 더 준다니까 떠났잖아. 미스 강도 언제 마음이 동할지 모른다고. 이제 주방장도 거기로 갔으니 미스 강을 줄기차게 유혹할 텐데?”
나는 은근히 미스 강의 마음을 떠보았다.
“만약 제가 춘천옥을 뜬다 해도 거긴 안 갈 거에요. 부모님은 오히려 잘됐다고 말씀하셨어요. 이젠 맘 놓고 춘천옥에서 일하게 됐다고요.”
“그럼 부모님은 주방장과 멀어지기를 바라신 모양이군.”
“당연하죠. 솔직히 저는 여러 번 뜰까 했어요. 범도 씨가 안 뜨면 제가 뜰 수밖에 없었죠. 지금까지 못 뜬 건 사장님 때문예요. 부모님도 항상 사장님 같은 분과 지내라고 말씀하셨어요. 인생을 배우라고요.”
“고마워. 그러고 보니 부모님을 뵌 게 오래됐군.”
“제 부모님들은 사장님 팬이세요.”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군. 혹 미스 강이 보탠 말은 아니겠지?”
“보탠 게 아니고요, 오히려 제가 한두 가지 생략했죠.”
“나에 대한 얘길 더 하셨다구?”
“좀 맹한 분 같은데 그 맹한 것이 사람을 매혹시키더라, 그러셨걸랑요. 그리고 그 맹한 것이 자꾸 사람의 마음을 맑게 씻어주는 것 같더라…”
“아빠가? 엄마가?”
“엄마가요.”
“그럼 집에 가서 엄마 아빠 당장 이혼하시라고 그래. 나도 당장 이혼할 테니.”
“엄마는 늙으셨는데요?”
“몸이야 늙으면 어때? 마음만 젊으면 되지.”
“실은 그 말은요, 엄마 말씀이 아니고 제가 꾸며낸 말이걸랑요.”
미스 강은 그 말을 던지고 얼른 밖으로 나간다. 나는 사뿐한 걸음걸이로 휴게실을 나가는 미스 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내 맹한 모습에서 마음의 정화를 느끼다니.
주방장 범도가 나를 찾아온 것은 이튿날 아침이다. 출근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 휴게실로 들어왔다.
“저 다른 데로 갈거유.”
범도의 말은 간단했다. 날씨는 내 기분만큼이나 우울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미스 강으로부터 들었던 사실이라 감정은 오히려 차분하다. 나는 어디로 갈 건지도 묻지 않았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너는 창업 공로자라 오래오래 지내면서 의지하고 싶었는데, 네가 자청해서 떠나겠다니 어쩔 수 없구나.”
“먼디로는 안 가유.”
“대승옥으로 가는 것 알고 있다. 어디에 가든 열심히 해라.”
“종종 놀러 올게유.”
“그건 안 된다. 너도 잘 알겠지만 일단 춘천옥을 떠나면 발길을 끊어야 한다. 내가 아끼던 능수엄마도 춘천옥을 떠난 이상 얼씬도 못하게 했잖니. 너희들은 여기 오는 게 재밌을지 몰라도 우리는 상처가 크다. 또 여기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기분도 상하게 되니 찾아오지 마라. 네가 다른 곳에 가는 것과는 다르다. 내 가슴에 못을 박겠다는 건데, 무슨 낯으로 찾아온다는 거니.”
“미안해유.”

“나도 너한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가슴 아프다. 그 집에서 너한테도 봉급을 배로 올려준다고 했을 테니, 그게 진실이면 우리 집에 있을 필요 없지.”
“미안해유.”
“나는 너를 잊지 못해. 착한 너를 어떻게 잊겠니. 네가 처음 왔을 때 땀을 삘삘 흘리며 메밀을 반죽하던 일 생각나니?”
“예에.”

김용만 소설가(잔아문학박물관 관장)

“그땐 참 신났었지. 영업 끝나면 우리 둘이 술 마시러 다니구.”
나는 그 말만 던져주고 서둘러 휴게실을 나와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대승옥에서 배신당할 걸 뻔히 알면서도 말리지 못하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말을 진심으로 들어 줄 리가 없는 범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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